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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1)[강원경제신문-202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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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조선시대(朝鮮時代)는 국시(國是)가 유교(儒敎)로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家父長的사회(社會)가 되다 보니 여성(女性)의 인권(人權)이 존중받기가 쉽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배경(時代的背景)속에서도 이례적으로 여성지도자(女性指導者)로서 활동한 인물(人物)이 있었으니 본 칼럼에 소개하는 강완숙(姜完淑.골롬바)이다.

 

그렇다면 강완숙은 여성의 권리(權利)가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적 배경에서 어떻게 여성지도자로 활동(活動)할 수 있었는지 그 생애(生涯)를 살펴 본다.

 

강완숙은 1761(영조 38) 5월 충남 내포지방의 양반 가문(兩班家門)의 딸로 탄생(誕生)하였는데구체적으로 진주강문(晉州姜門)의 후손(後孫)으로서 부친(父親)은 참판(參判)을 역임한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자세한 행적(行跡)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강완숙이 탄생할 당시에 일화(逸話)를 소개하면 부친은 아들을 원했으나 딸이 탄생하였다는 것인데마치 그 모습이 남성(男性)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성명(姓名)도 완전할 완()자와 맑을 숙()이라 하여 완숙(完淑)이라 지었다고 한다.

 

강완숙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聰明)하였다고 하며 당시의 사회적(社會的)인 관념(觀念)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부친으로 부터 직접 글을 배워 10여세가 될 무렵 소학(小學)과 열녀전(烈女傳)을 읽었다고 하니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남다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강완숙이 어린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인간(人間)의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해 상제(上帝)와 음양(陰陽)의 문제까지 관심이 있었다고 하니 이를 통해 그녀가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강완숙이 어느 날인가 가출(家出)을 하여 절에서 불경(佛經)을 공부하였다고 하니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강완숙의 가정생활(家庭生活)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면 충남 덕산의 풍산홍문(豊山洪門후손(後孫홍지영(洪芝榮)의 후처(後妻)가 되었다는 것인데그의 조부(祖父또한 강완숙의 부친처럼 참판을 역임하였다는 것이며전처(前妻소생의 아들 홍필주(洪弼周)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완숙의 삶에 중요한 변수(變數)가 발생하니 당시 내포지방에 이존창(李存昌)을 중심으로 천주교(天主敎)가 전파(傳播)되었을 때어린 시절 진리를 찾아 3개월 동안 절에서 불경을 공부하였던 강완숙으로서는 새로운 진리라 할 수 있는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존창을 만나서 교리(敎理)를 배웠으며마태오 릿치의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까지 읽은 이후 결국 천주교에 입교(入敎)하면서 그녀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轉換點)이 발생(發生)하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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