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30)[강원경제신문-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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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이 1823년(순조 23) 9월 28일 승지(承旨) 후보(候補)로 낙점(落點)되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얼마 후에 취소(取消)됐다.
1827년(순조 27) 10월에 윤극배(尹克培)가 정약용을 무고(誣告)하는 것이 끝이 없었는데, 그 해는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청정(代理聽政)하던 첫 해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정약용을 신임(信任)하였던 효명세자는 사암(俟菴)을 등용(登用)하고 싶었으나, 노론(老論)이 윤극배의 상소(上疏)를 통해 반대했다.
그러나 승정원(承政院)에서 상소를 올리지 않자 윤극배가 승정원에 직접 나아가 아뢰었으며, 그를 국문(鞠問)한 끝에 정약용이 무고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로부터 3년 후가 되는 1830년(순조 30) 5월 초5일에 약원(藥院)에서 탕제(湯劑)의 일로 아뢰어 부호군(副護軍)에 단부(單付)됐는데, 그해 효명세자의 환후(患候)가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하여 약원에서 아뢰어 약을 논의할 것을 청했다.
그런데 정약용이 명(命)을 받들어 들어가 진찰(診察)하니 환후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약을 달여 올리기로 하였으나, 미처 올리기도 전에 효명세자가 세상(世上)을 떠나니 초6일이었다.
한편,1836년(헌종 2)은 정약용이 75세가 되면서 2월 22일이 회혼례(回婚禮)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이러한 경사스런 날 진시(辰時)에 정침(正寢)에서 생(生)을 마치게 되니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참변(慘變)을 당한 1762년(영조 38)에 탄생(誕生)하여 어린 시절(時節), 신동(神童)의 명성(名聲)을 들었던 정약용이 정조(正祖)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정조가 승하(昇遐)를 한 이후 정국(政局)이 급속도로 돌변하여 결국 신유박해(辛酉迫害)라는 참사(慘事)가 발생했으며, 사암의 형제(兄弟)들은 천주교(天主敎)와 관련해 투옥되었다.
구체적으로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은 서소문 밖에서 장렬한 순교(殉敎)를 했으며, 정약용(丁若鏞)과 중형(仲兄) 정약전(丁若銓)은 유배 생활(流配生活)을 했다
처음에 정약용은 기장(鬐長), 정약전은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를 떠났으나 조카 사위 황사영 백서 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돼 다시 서울로 압송(押送)되어 국문을 받은 이후 사암(俟菴)은 강진(강진), 손암(巽庵)은 흑산도(黑山島)로 유배가게 됐다.
이와 관련해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하면서 500여권에 이르는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나, 손암은 해배(解配)되지 못하고 1816년(순조 16) 흑산도에서 운명(殞命)했다.
정약용은 마침내 강진 유배 생활을 마치고 1818년(순조 18) 마재로 귀향했으며, 그로부터 18년 후가 되는 1836년(헌종 2) 2월 2일 진시(辰時)에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끝으로 본 칼럼을 30회에 걸쳐서 연재할 수 있었던 것을 보람있게 생각하며, 조선 후기(朝鮮後期)의 실학(實學)을 집대성(集大成)한 유학자이면서 실학자였던 정약용(丁若鏞)의 고귀(高貴)한 생애(生涯)가 우리 사회(社會)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