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온공주 처소 '재동궁' 변천사 고찰[문암 역사작가의 보금자리-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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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7일 '복온공주와 연관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었다' 제하의 칼럼을 블로그에 올린 바 있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났는데, 오늘 지인과 2시간에 걸친 통화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복온공주의 처소 재동궁의 변천사를 고찰한다.
일단 칼럼의 제목에 '변천사'란 표현을 써서 거창하게 느껴질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그런 단계는 아니라는 점 밝혀둔다.
재동궁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자료는 순서로 볼 때 '복온공주가레등록(福溫公主嘉禮謄錄)'과 '명온공주방상장례등록(明溫公主房喪葬禮謄錄 )' 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표현상의 차이가 있다는 점인데, '복온공주가례등록'에는 재동본궁으로 소개되어 있는 반면에 '명온공주방상장례등록'에는 재동궁으로 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이지 공통점은 복온공주 처소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필자는 명온공주 처소를 죽동궁이라 하였으며, 덕온공주 처소를 저동궁이라 한 것으로 볼 때 대외적으로 복온공주 처소를 재동궁으로 호칭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왜 재동본궁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는 복온공주 가례시에 공주의 입장에서 재동본궁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으로 본다.
재동궁은 언제 건립된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해 '복온공주가례등록'에 의하면 삼간택을 통해 부마가 신안동김문의 김병주로 최종 간택된 이후 순조의 지시로 재동에 처소를 건립했다고 본다.
덧붙이면 복온공주의 가례를 거행하기 전까지 처소가 건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순조는 왜 복온공주 처소를 재동에 건립하라고 지시한 것일까?
사실 건립을 지시한 이유까지는 기록이 없기에 팩트 차원이 아닌 추정이라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필자는 당시 재동에 순조의 형님이 되는 문효세자와 어머니뻘이 되는 의빈성씨의 사당인 '문희묘'가 있었기에 그러한 배경으로 재동에 건립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여기서 재동궁의 규모와 관련해 명온공주와 덕온공주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부지가 2,500평은 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건평에 대한 규모가 전체적으로 몇칸이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덧붙이면 공주의 처소이기에 적어도 수백칸에 이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그런데 복온공주가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가례를 올린 지 불과 2년만에 졸서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복온공주가 졸서한 이후 ' 갑오재동제물정례책(甲午齋洞祭物定例冊)'에 근거해 순조의 지시로 사당을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하나 엄밀히 말해 그 실체가 완전히 확인된 것은 아니라는 점도 밝혀 둔다.
재동궁에서 거주하던 부마 김병주의 삶에 새로운 변수가 발생하니 그 시기는 아직은 명확치는 않은데, 그 처소를 재동에서 바로 송현동으로 이주한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복온공주의 처소가 송현동에 마련되어 그 곳에서 졸서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팩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병주가 언제 이주한 것도 중요하나 과연 무슨 이유로 재동에서 송현동으로 이주한 것인지 그 실체도 규명되지 않았다.
본 연구의 최종 목표는 복온공주의 사당이 '관월당(觀月堂)'과 같은 건축물인지 여부를 밝히는 것이나 그 이전에 규명해야 할 여러 사안이 있다는 것이니 이 여정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는 점을 절실히 깨닫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김병주가 이주한 시기와 관련해 하나의 단서가 있는데,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1838년 심상규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귀주궁貴主宮)'으로 변모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좀더 딕테일하게 들어 간다면 심상규의 3년상을 치르고 김병주가 1842년경에 송현동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본다.
한편 김병주가 송현동으로 처소를 이주한 이후 재동궁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 하나의 단서가 있는데, 1880년 고종황제와 영보당 이씨 사이에 탄생한 완화군이 건강이 급격히 안좋은 상황에서 재동궁에 잠시 머물다가 그곳에서 졸서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완화군이 재동궁에 머물기 전에 재동궁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완화군이 재동에서 졸서한 이후 재동궁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기록 또한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상과 같이 재동궁의 변천사를 소개하였는데, 1830년 순조의 지시로 재동궁이 건립된 이후 1880년 완화군이 잠시 머물다가 졸서하기 까지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결론적으로 본 칼럼은 일단 1880년까지의 재동궁의 변천사를 고찰한 것이고 차후에 그 이후의 역사를 밝히게 되면 후속편으로 올릴 예정이다.
2026년 5월 12일(화) 문 암 올 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