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9)[강원경제신문-202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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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1780년(정조 4) 봄에 정재원(丁載遠)이 화순 현감(和順縣監)의 소임(所任)을 마치고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赴任)하였는데, 당시 서울에 있던 정약용(丁若鏞)은 다시 예천으로 내려와 부친(父親)을 봉양(奉養)하면서 반학정(伴鶴亭)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 해가 가기 전에 정재원이 암행어사(暗行御史)의 탄핵(彈劾)으로 예천 군수에서 체직(遞職)되어 마재로 귀향(歸鄕)했다.
1782년(정조 6) 정약용은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봉은사(奉恩寺)에 보름동안 머물면서 경의과(經義科)를 공부했으며, 보름만에 귀가(歸家)하였다.
그 이듬해인 1783년(정조 7) 2월 순조(純祖)의 왕세자 책봉(王世子冊封)을 경축(慶祝)하기 위한 증광 감시(增廣監試)에서 정약용은 정약전과 함께 경의 초시(經義初試)에 급제(及第)했으며, 이어서 4월에 실시(實施)한 회시(會試)에 생원(生員)으로 급제(及第)한 이후 창덕궁 선정전(昌德宮宣政殿)에서 정조(正祖)와 운명적(運命的)인 첫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만남에서 정조는 정약용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을 때 사암(俟菴)은 임오생(壬午生)이라 답변(答辯)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임오생이라 함은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참변(慘變)을 당한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있었던 해이기에 그의 이러한 답변은 정조에게 깊은 인상(印象)을 주었다.
정약용은 생원(生員)으로서 대과(大科)를 준비하기 위해 그해 4월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태학생(太學生)의 신분(身分)이 됐는데, 특히 이듬해인 1784년(정조 8)에 정조가 모든 태학생들에게 중용(中庸)에서 의문나는 70개 항목(項目)을 선정(選定)해 여기에 대한 답변(答辯)을 제출(提出)하라는 과제(課題)를 내렸다.
이러한 상황(狀況)에서 사돈으로서 평소 학문(學問)이 뛰어났던 이벽(李檗)에게 도움을 부탁했는데 당시 수표교에 거주하고 있던 광암(鑛菴)은 정약용보다 8세 연상(年上)이었는데 사암이 광암과 공동(共同)으로 연구(硏究)해 과제를 제출했으며, 정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1789년(정조 13) 정약용은 마침내 대과에서 급제(及第)한 이후 희릉 직장(禧陵直長)에 제수(除授)되면서 첫 관직 생활(官職生活)이 시작됐으며, 대신(大臣)들의 품의(稟議)로 초계 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選拔)되어 규장각(奎章閣)에서 월과(月課)에 답변을 올리게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관직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노론(老論)의 탄핵(彈劾)을 받아서 해미(海美)에 유배(流配)되었다가 다시 10일만에 해배(解配)되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으니, 이는 앞으로의 상황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暗示)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다시 지평(持平)으로 제수됐다가 1792년(정조 16) 정약용의 선대(先代)와 깊은 인연(因緣)이 있는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으로 옮겼는데, 특히 홍문관은 사암의 선조(先祖)들 중에서 8대가 연속적(連續的)으로 재임(在任)한 곳이어서 그 상징적(象徵的)인 의미(意味)가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