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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4일 다해 연중 제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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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맛을 간직한 소금인지, 맛을 잃은 소금인지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을 몇 년 동안 그대로 두면 짠맛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쓸모없는 소금을 불 속에 넣었습니다. 우리도 짠맛을 잃으면 그런 소금처럼 불 속으로 들어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짠맛을 잃었는지, 아니면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은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우리가 누군가에게 죄를 짓게도 하고 짓지 않게도 하는 영향력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영향력을 주면 그 사람은 짠맛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옥 불에 들어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인간의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지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정말 그럴까요? 환경의 힘은 상상 이상입니다.  


   『다정함의 과학』의 저자 ‘켈리 하딩’은 6살 생일 때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부모님이 마술사를 불러 자신과 친구들에게 생일파티를 열어준 것입니다. 그때 수건에서 흰 토끼가 나오기도 하고 어항과 금붕어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마술사는 그녀에게 금붕어가 든 어항을 선물하였습니다. 켈리는 그 금붕어를 스누피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좋아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켈리는 스누피가 보고 싶어서 가장 먼저 어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스누피가 죽어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우울해진 켈리가 울자 엄마는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얘야, 금붕어는 원래 오래 살지 않아. 이제 떠날 때가 되었던 거야.” 


그런데 자라면서 엄마의 말이 거짓인 것을 알았습니다. 금붕어는 환경만 좋으면 20~30년도 살 수 있습니다. 작은 봉지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금붕어가 유리 어항에 혼자만 들어있어서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그녀는 사람도 환경의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만은 개인 성향의 차이일까, 아니면 환경의 영향이 클까를 연구했습니다. 뉴욕에서 소호 스프링가에서 업타운으로 향하는 C라인 지하철을 타면 10명 중 한 사람 정도가 비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20분 정도(10㎞) 가면 할렘의 웨스트 125번가가 나오는데 여기는 네 명 중 한 명이 비만입니다. 마찬가지로 어퍼 이스트사이드의 96번가에서 6호선 업타운 행을 타고 8㎞ 정도 북쪽으로 가서 브롱크스에서 내리면 비만은 세 명 중 한 명으로 증가합니다. 


    거리가 멀지 않은 같은 뉴욕 시내에서도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말 유전적으로 비만이 될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 사는 것일까요? 그러면 지역에 따른 편차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원인은 환경 때문입니다. 비만이 되는 음식을 파는 식당들을 찾기 어려우면 그 지역에서는 비만율이 낮다고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 환경을 좋아하면 그 환경을 닮아갑니다. 아기에게 환경이 되어주는 부모나 어른들이 곧 아이들의 소금입니다. 그 짠맛을 간직하였다면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고 짠맛을 잃었다면 아이들은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옥사나 말라야’는 세 살 때 알코올 중독에 걸린 부모에게 버려졌습니다. 추운 겨울에 버려진 그녀는 본능적으로 따듯한 곳을 찾아 움직였습니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바로 개들이 사육되고 있던 오두막입니다. 그들의 부모는 그녀를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옥사나는 날고기와 개 사료를 먹으며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옥사나가 발견되었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람인지 들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람에게 발견이 되었지만, 옥사나가 인간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인간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네 발로 걷고 개처럼 짖었습니다. 네 발로 나무를 단숨에 뛰어넘는 모습은 영락없는 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옥사나를 보면서 강아지에게서 보는 귀여움을 느낄 수 없을까요? 우리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옥사나에게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지 못하는 옥사나가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인간의 본성을 지닌 사람의 시선입니다. 이 때문에 바꾸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옥사나에게 정말 오랜 시간 인간답게 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히고 머리카락을 다듬었습니다. 그런데 옥사나는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할까요, 아니면 아직도 개라고 생각할까요? 두 발로 걷는 것을 배우기는 했지만, 여전히 네 발로 걷는 것이 더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네 발로 걸으며 개처럼 으르렁거립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인간의 모습이라 해도 생존하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었고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개라는 믿음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만들어줄 수 있는 환경이란 바로 ‘내가 누구냐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짐승과 같다면 자녀도 짐승과 같은 존재라 여기고 그렇게 자랍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종교교육을 제대로 해줘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춘기는 더는 부모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시기입니다. 다른 성장의 환경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좋은 환경이 제공되지 않으면 아이는 마치 개 우리에서 성장하는 것처럼 세속적인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기 전 첫영성체 때 정말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분들의 환경에서 살게 해야합니다.  


    소금의 역할이란 나의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의 환경 안에서 살게 하는 일입니다. 아기가 태중에서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태중에서 성장한다고 믿게 하는 일입니다. 옥사나는 자신이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소금의 짠맛을 잃었던 부모입니다. 우리가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짠맛을 유지하려면 내 환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본성이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내 안에 머무는 이들은 이 믿음에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금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나의 짠맛을 가장 잘 확인할 방법은 자녀를 보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여 부모의 환경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부모가 만들어주는 환경대로 자랍니다. 내가 키운 아이들이 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있다면 나는 짠맛의 소금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환경입니다.  


    나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이 동물의 본성에서 벗어나고 있나요? 그러면 나는 짠맛을 간직한 소금입니다. 지옥 불에 떨어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머무는 이들이 돈에 대한 욕심과 성적인 즐거움, 교만한 말과 행동을 더 찾게 된다면 나는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나와 함께 머무는 이들 대부분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살펴보십시오. 내가 곧 이웃의 환경입니다. 


 https://youtu.be/FokOWmvEpTE 


유튜브 묵상 동영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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