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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천주교방학동성당 &amp;gt; 본당단체 &amp;gt; 남성구역분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link>
<language>ko</language>
<description>남성구역분과 (2022-04-17 09:36:25)</description>

<item>
<title>2022년 4월 17일 다해 주님 부활 대축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100</link>
<description><![CDATA[<p>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 </p>
<p><br /></p>
<p>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p>
<p><br /></p>
<p>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6)라고 말합니다.  </p>
<p><br /></p>
<p>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으로서 부활하실 수 있으셨다면 같은 하느님 자녀인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p>
<p><br /></p>
<p>    바오로 사도는 또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라고 말합니다.  </p>
<p><br /></p>
<p>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현세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이 우리를 악인으로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합니다.  </p>
<p><br /></p>
<p>    사람이 모기와 예수로 나뉜다고 할 때, 모기가 되는 이유는 현세적 집착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생존하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p>
<p><br /></p>
<p>    ‘종말’에 관한 영화를 보면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 살려고 기를 씁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p>
<p><br /></p>
<p>    1960년대 초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2차 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권력에 대한 복종 실험을 시행한 바 있습니다. </p>
<p><br /></p>
<p>    지원자들은 교사와 학생군으로 분류됐고, 교사가 낸 문제를 학생이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기의 전압을 15볼트씩 올리도록 했습니다. 물론 충격기는 가짜였고, 지원자들은 이를 몰랐습니다. 또한 학습자(학생)는 밀그램이 섭외한 배우였습니다. </p>
<p><br /></p>
<p>    실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밀그램의 불합리한 지시와 통제 속에 실험자의 65%가 최고수치인 450V까지 전기충격기를 올린 것입니다. 학습자(배우)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면 즉각 실험을 포기할 것이란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살려달라는 학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밀그램의 말에 피험자들은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전기를 흘려보냈습니다.  </p>
<p><br /></p>
<p>    밀그램은 자신의 저서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 ‘복종 실험’에 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p>
<p><br /></p>
<p>    “놀라운 것은 (피험자들이) 실험자의 지시에 너무나 기꺼이 따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실험의 결과는 놀랍고도 당혹스럽다. 많은 피험자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실험자에게 항의하지만, 상당수의 피험자가 전기충격기의 마지막 단계까지 계속한다.” </p>
<p><br /></p>
<p>    마찬가지로 1971년에 행해진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실험’을 통해 강압적인 특수 환경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관찰했습니다. </p>
<p><br /></p>
<p>    모의 감옥에서 피험자들은 교도관과 죄수로 나뉘었고, 각각의 역할을 수행토록 했습니다. 어색하던 분위기와 달리 교도관들은 죄수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점점 고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관의 행위는 악랄해졌고, 통제 불능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실험 5일째에는 성적 고문까지 이어졌습니다. 강하게 저항하던 죄수들은 저항력을 상실했고, 간수들의 권위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됐습니다. </p>
<p><br /></p>
<p>    인간이 동물적 본성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 충격적 결말입니다. 또 이 실험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 자란 독일인들이 어떻게 유대인들을 500만 명이나 비인간적으로 학살할 수 있었는지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p>
<p><br /></p>
<p>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유대인들을 언젠가는 부활하여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렇게 학살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실험이 끝난 뒤에 교도관을 했던 사람들과 죄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함께 며칠 동안 소풍 가는 프로그램이 계획되어 있었다면 교도관들이 그렇게 악랄하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p>
<p><br /></p>
<p>다시 만나야 함을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p>
<p><br /></p>
<p>    전기충격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전기충격을 준 그 사람을 나중에 문을 열고 만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렇게 끝까지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p>
<p><br /></p>
<p>    그런데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이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서 죽음 앞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p>
<p><br /></p>
<p>    영화 ‘리스타트’(2019)는 죽으면 매일 아침 7시에 똑같은 삶을 시작한다는 전제의 영화입니다. 아침 7시가 되자마자 킬러들이 들이닥칩니다. 이렇게 수십 번 죽고 나니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게 됩니다. 본인도 왜 이런 삶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전의 기억들이 축적되어 킬러들을 소탕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집과 차와 생명까지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p>
<p><br /></p>
<p>    주인공은 이혼한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집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그들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하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는 죽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200번 가까이 죽으며 그들이 죽기 전에 도달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지 않게 합니다. 죽었다 깨어남을 반복할 때 유일하게 가치 있게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어차피 죽고 부활하면 아무 상관 없지만 사랑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란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p>
<p><br /></p>
<p>    인간은 원죄의 영향으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변할 수 있습니다.  </p>
<p><br /></p>
<p>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자신들이 찌른 상처를 그대로 지니신 채 자신들 앞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실 것을 믿었다면 그분을 그렇게 찌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p>
<p><br /></p>
<p>    우리가 착해지지 못한 이유는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입니다. 나의 선택입니다. 착해지고 싶은지,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는지에 달렸습니다. 다만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내 죽음엔 무관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착해지기 위해서입니다. </p>
<p><br /></p>
<p>전삼용 요셉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7T09:36:25+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7일 주님 부활 대축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9</link>
<description><![CDATA[<p>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40일간의 사순시기를 모두 지내고 우리는 예수님의 기쁜 부활을 맞이했습니다. 정말로 기쁘신가요? 혹시 반복되는 또 하나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시겠죠?</p>
<p><br /></p>
<p>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활’은 우리가 기쁘게 신앙생활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기쁘게 부활을 맞이합니까?</p>
<p><br /></p>
<p>매년 맞이하는 것이니 힘들지 않겠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생일을 기억해보세요. 매년 맞이하는 생일인데 왜 의미 있는 시간으로 생각하십니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갖게 된 기념일은 또 어떻습니까</p>
<p><br /></p>
<p>매년 똑같이 맞이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맞이하는 연중행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p>
<p><br /></p>
<p>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오직 신앙 안에서, 또 사랑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마치 주님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셨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p>
<p><br /></p>
<p>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갑니다. 여기에 그녀는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향유를 바르려면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을 치워야 하는데,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다른 복음에서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갔다고 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자들의 힘으로 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덤에 향유를 들고 찾아갑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p>
<p><br /></p>
<p>이 사랑을 들고 무덤을 찾았지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말합니다.</p>
<p><br /></p>
<p><br /></p>
<p>“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p>
<p><br /></p>
<p>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요한과 함께 뛰어갑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 예수님의 얼굴에 쌌던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신을 도둑맞지 않았다는 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p>
<p><br /></p>
<p>사랑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p>
<p><br /></p>
<p>오늘의 명언: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애덤 스미스).</p>
<p><br /></p>
<p><br /></p>
<p>빠다킹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7T09:35:53+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5일 다해 주님 수난 성금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8</link>
<description><![CDATA[<p>왜 그리스도를 잡아 바치는 사람이 꼭 ‘나’여야 하는가? </p>
<p><br /></p>
<p>  제가 비르짓다의 주님 수난 ‘7기도’를 바치면서 궁금했던 것 하나는 나의 죄를 대신해 그리스도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p>
<p><br /></p>
<p>예를 들면 첫 번째로 짓는 중죄를 막기 위해 “예수님의 첫 번째 상처와 그 첫 번째 고통과 첫 번째 피흘리심을 바치나이다”라고 하던가,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해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당하신 무서운 고통과 흘리신 그 하나하나의 핏방울을 모두 바치나이다”라는 식입니다.  </p>
<p><br /></p>
<p>    오늘 요한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치는 사제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요한의 수난 복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겉옷과 속옷을 나누어 가지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병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의 겉옷을 네 개로 쪼개어 나누어 갖고 속옷은 제비를 뽑았습니다. 사제의 속옷은 흰 아마포로 되어있었고 정결함을 상징했습니다.  </p>
<p><br /></p>
<p>    저는 왜 우리가 직접 그리스도를 죽여 바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지 알렉산드로와 마리아 고레티의 예를 들어 다시 들며 설명해보고 싶습니다.  </p>
<p><br /></p>
<p>알렉산드로는 순결한 마리아 고레티를 칼로 수십 차례 찔러 죽였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못하고 감옥에서도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때 마리아 고레티는 알렉산드로에게 나타나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주었습니다. 그제야 알렉산드로는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욕정이 순결한 그녀를 죽게 했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p>
<p><br /></p>
<p>마리아 고레티가 알렉산드로에게 준 백합이 오늘 복음에서는 로마 병사가 제비를 뽑아 갖게 된 예수님의 속옷과 같습니다.  </p>
<p><br /></p>
<p>    속옷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비는 운입니다. 운이 좋은 사람만 그리스도의 순결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흠이 없이 정결한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바로 나의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워 그 죗값으로 그가 죽게 만들어야 그 순결한 이의 순결한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p>
<p><br /></p>
<p>    만약 정결하지 못한 여인을 죽인 것이라면 알렉산드로는 정결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부정한 것을 없앴다고 오히려 자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죄 때문에 나의 가장 사랑하고 순결한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했다고 느낄 때 그 순결함을 내가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곧 내가 그리스도를 봉헌한다고 다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분으로부터 백합을 받는 이들만이 그분의 순결함을 입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이 내 죄 때문임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이들에게 이 행운을 주십니다.  </p>
<p><br /></p>
<p>    그렇다면 겉옷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바로 ‘지위’입니다. 옷은 지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네 개로 나누어 가졌다는 말은 이 지위를 원하는 이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은총의 풍부함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한 줄기였던 물이 나중엔 네 줄기로 나누어져 온 땅을 비옥하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숫자 ‘4’는 동서남북을 가득 채울 수 있는 풍부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말합니다.  </p>
<p><br /></p>
<p>    알렉산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기에 순결한 마리아 고레티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온 뒤 고레티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자신은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정원지기로 살며 보속하다가 죽습니다. 그때 채우지 못했던 욕정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리아 고레티가 가진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그녀를 찌름으로써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찌름으로써 하느님의 지위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찌른 이가 누구인지 보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p>
<p><br /></p>
<p>예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이교도에게 총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위험한 부위를 지나쳐서 살 수 있었고, 교황은 그 광신도를 찾아가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을 자신이 믿은 종교 때문에 그렇게 다치게 하였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는 그 종교에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황이 지닌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지위 탓이 아니라고 여기면 교황이 주려는 겉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p>
<p><br /></p>
<p>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을 에사우라고 하였듯이, 내가 그리스도를 죽이는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겉옷을 입는 이유입니다.  </p>
<p><br /></p>
<p>    짐 엘리엇(Jim Eliot, 1927-1956)은 미국의 침례교회 선교사입니다.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 및 세계 성서번역 선교회(GBT)선교사이며, 에콰도르 원주민을 선교하려다가 순교하였습니다. </p>
<p><br /></p>
<p>    짐 엘리엇은 1927년 10월 8일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아버지 프레드(Fred)와 스위스 출신의 어머니 클라라(Clar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부모 밑에서 자란 짐 엘리엇은 1945년 가을 일리노이 주서부 시카고에 위치한 복음주의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 학교인 휘튼 대학교(Wheaton College)에 진학하여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선교를 위해서 생애를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p>
<p><br /></p>
<p>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SIL 교육기간을 거쳐 1952년 봄 에콰도르에 도착한 짐 엘리엇은 와오다니(Waodani)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현지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함께 선교활동을 할 친구들을 모았습니다.  </p>
<p><br /></p>
<p>    몇 달 전부터 비행기를 이용하여 선교 방송과 함께 선물꾸러미를 투하해 접촉을 준비한 짐 엘리엇과 일행 4명(네이트 세인트,피트 플레밍,로저 유드리언,에드 맥컬리)은 1956년 1월 8일 와오다니(Waodani) 부족민들과 직접 접촉하려고 했으나, 백인에 대해 적대적인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전원 사망했습니다.  </p>
<p><br /></p>
<p>    이상한 것은 그들의 주머니에 권총이 그대로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발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엇은 아우카족에게 제대로 복음도 전하지 못했고 성경책 한 권도 전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 열매는 매우 컸습니다. </p>
<p><br /></p>
<p>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Elisabeth)는 남편이 순교한 지 2년이 지난 1958년 가을에 그녀 역시 목숨을 걸고 남편이 이루지 못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린 딸 밸러리(Valerie)와 함께 아우카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만나 본 아우카 부족은 남자 어른이 8명에 불과한 56명의 작은 부족이었습니다. </p>
<p><br /></p>
<p>    이 종족은 여자들은 죽이지 않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아우카 부족이 복음화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을 살해한 3명이 현재 와오라니 교회의 목사와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목사들을 죽인 이들이 목사가 된 것입니다.  </p>
<p><br /></p>
<p>    우리는 부모를 죽이고 부모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부모의 속옷과 겉옷을 입었습니다. 부모의 피를 통해 우리 동물적 본성이 정결하게 되었고 부모의 인간성을 물려받아 인간과 교류할 수 있는 지위에 올랐습니다.  </p>
<p><br /></p>
<p>    이렇듯 나는 지금 누군가를 죽이고 그 누군가의 정결함과 정체성을 입어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사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p>
<p><br /></p>
<p>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가진 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 살려면 하느님 자녀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정결함과 지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그분에게 채찍질하고 멱을 따고 십자가에 못 박고 껍질을 벗기고 토막 내 불살라야 합니다. 이것이 제물을 바치는 방식입니다.  </p>
<p><br /></p>
<p>    그리고 그분이 누구셨는지 알아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정결함과 지위를 얻어 영원한 나라에서 살 자격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돌아가신 이유고 이것이 내가 그분을 죽여 봉헌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p>
<p><br /></p>
<p>전삼용 요셉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5T19:16:43+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5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7</link>
<description><![CDATA[<p>이 세상 안에서 주어지는 죄의 유혹에 올바르게 살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죄의 구렁텅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뉴스를 보면 너무 쉽게 볼 수 있는 악행의 모습들을 보며 진짜로 그렇다는 확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들처럼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남들처럼 무감각하게 죄짓는 것이 당연하고, 오히려 이런 환경을 주신 하느님을 원망해야 할까요?</p>
<p><br /></p>
<p>창세기에 나오는 롯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사촌 형인 아브라함과 땅을 나눌 때 자신의 욕심 차리기에 급급해서 비옥해 보이는 소돔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악으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그네로 보이는 천사에게 행한 그의 모습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천사를 지키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하지요. 결국 이런 사랑의 행동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속에서 탈출할 수 있게 했습니다.</p>
<p><br /></p>
<p>오히려 악인이 가득한 소돔에 있을 때 그가 선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장소나 상황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들도 위기 체험을 통해 거룩해졌다고 하지요.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도회에서 독방에 갇혀 있어야 했었고, 이냐시오 성인들도 교회로부터 거부를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순명하셨습니다. 이 안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p>
<p><br /></p>
<p>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지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왜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가장 큰 사랑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셨고, 사랑에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p>
<p><br /></p>
<p>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을 향해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이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며 적의를 보입니다.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이 이제 감히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습니다. 모든 악이 이 안에 가득한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 커다란 은총이 있었습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 이 악을 이겨낸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p>
<p><br /></p>
<p>지금을 사는 우리도 악의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평불만으로 이 악을 이겨낼 수 없다면서 남들처럼 사는 편한 방법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악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면서 이겨내셨듯이, 우리 역시 이 안에서 주님께 순명하면서 사랑에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나의 구원도 가까워집니다.</p>
<p><br /></p>
<p><br /></p>
<p>오늘의 명언: 용기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즉,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도 없다(에디 리캔배커).</p>
<p><br /></p>
<p><br /></p>
<p>빠다킹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5T19:16:15+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4일 다해 주님 만찬 성목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6</link>
<description><![CDATA[<p>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당신의 머리를 그 사람 발 밑에 놓으십시오 </p>
<p><br /></p>
<p>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날입니다. 베드로는 강력히 반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
<p><br /></p>
<p>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p>
<p><br /></p>
<p>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시는 것은 단지 몸의 더러운 부분을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때를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여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p>
<p><br /></p>
<p>    그런데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요한 13,11)라고 하십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는 왜 깨끗해질 수 없었을까요? 자신 발밑에 들어온 예수님의 머리를 밟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밑에 들어오실 만큼 낮아지셨기에 어떤 제자들은 자신의 발을 더는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유다는 자기 발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을 밟은 것입니다. 발은 자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p>
<p><br /></p>
<p>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요한 13,18) </p>
<p><br /></p>
<p>    신랑은 신부를 정결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자기 머리를 아내의 발밑에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아내에게 주어 아내가 집을 나가라면 거지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아내는 정결해집니다. 이것이 누군가를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물론 유다와 같은 아내는 그런 남편을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남편의 의무는 이것입니다.  </p>
<p><br /></p>
<p>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택배회사를 지원했을 때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유통업에 종사하는 정우철(30) 씨는 1년 중에 한 4개월은 너무 바빠서 5시간 이상 잘 수 없는 처지입니다. 항상 새벽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고 아내는 육아에 너무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몰래카메라로 아내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p>
<p><br /></p>
<p>    남편은 먼저 아내를 카페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서 몸이 안 좋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9년 동안 열심히 해 왔고 그래서 묻습니다.  </p>
<p><br /></p>
<p>    “내가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할 거 같아?” </p>
<p><br /></p>
<p>    “자기 건강 때문에 그런 거니까…. 같이 있는 시간도 많겠네.” </p>
<p><br /></p>
<p>    “일을 하긴 해야 하는데.” </p>
<p><br /></p>
<p>    “모아둔 돈 있으니까 괜찮아. 일 바로 하지 말고 쉬고 생각해.” </p>
<p><br /></p>
<p>자신을 배려하는 아내에게 오히려 미안해집니다. 아내도 남편이 건강검진 해서 안 좋은 결과가 나온 것도 몰랐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p>
<p><br /></p>
<p>    남편이 잠깐 자리를 뜨고 택배회사에서 취직이 결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다시 자리에 돌아온 남편이 코로나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남편 혼자 짐을 짊어지게 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합니다. 아내는 울면서 말합니다. </p>
<p><br /></p>
<p>    “자기가 나한테 말하기까지가 힘든 거지. 수아 좀 더 크면 같이 일하자.” </p>
<p><br /></p>
<p>    “애 키우며 어떻게 일까지 해.” </p>
<p><br /></p>
<p>    “다 그렇게 해. 우리가 안 그랬을 뿐이야.” </p>
<p><br /></p>
<p>남편은 자기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합니다. 편하게 해주겠다고 결혼했으니까. 아내는 지금도 아주 편하니까 쉬운 일 함께 나눠서 하자고 합니다.  </p>
<p><br /></p>
<p>    사실 그동안 아내는 육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우울증은 무언가에 대한 불만입니다. 그런데 이제 남편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남편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p>
<p><br /></p>
<p>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마.” </p>
<p><br /></p>
<p>남편도 아내의 진심에 눈물이 터집니다. 아내의 산후우울증으로 아내가 자신을 조금은 원망하는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p>
<p><br /></p>
<p>    변화는 나를 내려놓고 누군가의 처신에 자신을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몰래카메라인 것을 알고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p>
<p><br /></p>
<p>    “남편한테 신경을 못 써서 많이 미안했어요. 건강검진 가는 것도 몰랐는데 그냥 다 미안했어요. 남편이 이렇게 우는 걸 처음 봐서. 진짜 힘들었구나!” </p>
<p><br /></p>
<p>[출처: ‘갑자기 일을 그만둔 남편, 그리고 아내의 한마디’, 유튜브 채널, 엔스크린] </p>
<p><br /></p>
<p>    죽을 고생을 하고 아내에게 다 내어주어 자신의 처신을 아내에게 맡겨야 아내가 변화합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 남편도 변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파스카’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는 방법이 이것입니다.  </p>
<p><br /></p>
<p> </p>
<p>    물론 요즘에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을 살해한 아내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혼했으면 남자는 아내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남편의 의무입니다. 저는 남편이 아내를 돈으로 복종시키려는 것을 보면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버는 것도 다 가져다주고 재산 명의도 다 아내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가 생각합니다. 내가 남편을 밟을 수 있을 때 밟지 않게 되면 그것이 아내가 깨끗해지는 길입니다.  </p>
<p><br /></p>
<p>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발을 씻어주는 것만도 대단한데 이스카리옷 유다의 발에 짓밟히기까지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이렇게 우리를 정결하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 발꿈치 밑에 당신 머리를 놓으시고 우리 처신에 당신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를 깨달으면 말로만 상대를 바꾸려 하는 일은 멈출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p>
<p><br /></p>
<p>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악처로 유명하였습니다. 남편이 다른 이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내는 소리쳤고 심지어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물을 머리에 부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천둥이 치면 비가 오는 법이지!”라고 하며 자신의 처지를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아내가 변하고 안 변하고는 아내의 몫입니다.  </p>
<p><br /></p>
<p>    소크라테스는 나라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을 썼습니다. 악법도 법이라며 나라의 처신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충분히 도망쳐서 다른 나라에서 잘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라의 처신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변하고 안 변하고는 나라에 달려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는 방법으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p>
<p><br /></p>
<p>    아내가 깨끗해졌다는 말은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배우 정은표 씨 아내는 가정이 힘들 때 혼자 아르바이트하였습니다. 한 달 30만 원 월급으로 1년 이상을 버텨야 했습니다. 그러면 무능한 남편 탓을 할 수도 있고 이렇게까지 된 것이 자신의 노력이라 여길 수도 있을 텐데 항상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아이들이 아빠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려 한다면 자신이 나서서 아이들을 순종하게 합니다. 남편을 먼저 챙기고 남편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나가 안아줍니다. 이렇게 한 것에는 물론 정은표 씨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족을 위해 바친 덕도 있습니다. 분명 그렇게 깨끗해졌을 것입니다.  </p>
<p><br /></p>
<p>    요즘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면 큰일 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생명을 바치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그 신비 안에서 알려주신 관계의 진리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저절로 잘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삼위일체 하느님, 곧 아버지의 희생, 그리고 아드님의 순종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나라입니다.</p>
<p> </p>
<p>전삼용 요셉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4T19:22:27+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4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5</link>
<description><![CDATA[<p>군입대 후 신병교육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부식으로 건빵을 주었는데, 정해진 시간에 다 먹지 않으면 수거해가는 것입니다.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남은 건빵이 아까워서 몰래 숨겼습니다. 그러나 떳떳하게 건빵을 꺼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조교가 알게 되면 저 때문에 전체 얼차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에 화장실에 가서 건빵을 몰래 먹었습니다.</p>
<p><br /></p>
<p>이 화장실이 지금처럼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라, 냄새가 아래에서 풀풀 올라오는 재래식 화장실입니다. 배고프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아마 대부분 인상을 찌푸리면서 “더러워. 그렇게라도 먹고 싶을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p>
<p><br /></p>
<p>현재, 화장실에서 당연히 무엇을 먹지 않습니다. 더럽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화장실보다 더 더러운 곳에서 음식을 먹고, 또 그 더러운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먹기도 합니다. 화장실 변기 옆에서 그리고 변기를 바라보며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스마트폰이라고 하지요. 스마트폰에 붙어 있는 세균은 화장실보다 18배 많다고 합니다.</p>
<p><br /></p>
<p>스마트폰은 우리 삶에 매우 유용하지만, 세균 덩어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유해성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가는 데 커다란 걸림돌인데도 이 죄의 유혹을 끊지 못합니다.</p>
<p><br /></p>
<p>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사랑과 봉사의 나라이지 권력과 통치력으로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겸손과 사랑의 일치를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십니다. 바로 제자들의 발을 직접 닦아 주시지요.</p>
<p><br /></p>
<p>이들은 아직도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말싸움하기도 하고, 실제로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겼습니다. 그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p>
<p><br /></p>
<p>사랑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세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은 권력 지향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솔선해서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p>
<p><br /></p>
<p>“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p>
<p><br /></p>
<p>예수님의 이 모범을 따르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쫓는 삶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것을 쫓아야 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p>
<p><br /></p>
<p><br /></p>
<p>오늘의 명언: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패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벤자민 플랭클린).</p>
<p><br /></p>
<p><br /></p>
<p>빠다킹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4T19:21:54+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3일 다해 성주간 수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4</link>
<description><![CDATA[<p>&lt;나는 은전 30냥으로 무엇을 잃는지 아는가?&gt;  </p>
<p><br /></p>
<p> 오늘 복음은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기는 이야기입니다. </p>
<p><br /></p>
<p>죄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면서도 은전 30냥의 가치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하느님 사랑을 잃는 것보다 어떻게 얼마 되지도 않는 가치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할까요?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모든 죄 안에는 항상 은전 30냥의 즐거움이 깃들어있습니다.  </p>
<p><br /></p>
<p>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죄를 짓고 남을 미워하는 등의 죄 속에 머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입니다. 그 사람은 그냥 은전 30냥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집을 꺾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그 사람을 미워하며 자신은 의롭다고 느끼는 은전 30냥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 은전 30냥으로 더 큰 가치를 잃습니다.  </p>
<p><br /></p>
<p>    남편을 먼저 사랑해야 할까요, 아니면 아이를 먼저 사랑해야 할까요? 이것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남편의 사랑을 포기하더라도 자녀들에게 더 잘해주려 합니다. 자녀를 통해 얻는 은전 30냥이 있기 때문입니다.  </p>
<p><br /></p>
<p>    SBS 영재발굴단에서 “엄마, 난 언제 놀 수 있어?”라고 말하는 8살 세윤이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세윤이는 매일 11개의 학원에 다닙니다. 그냥 여느 가정의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묻습니다.  </p>
<p><br /></p>
<p>    “나 한자 복습 오늘 해야 해? 한자 급수 안 외워도 되잖아.”</p>
<p>엄마는 무덤덤하게 대답합니다.  </p>
<p><br /></p>
<p>    “어, 금방 하잖아!”</p>
<p>    “놀고 싶어. 엄마 나 그럼 언제 놀 수 있어?”</p>
<p>   “놀 수가 없을 수도 있겠네.”</p>
<p>    “왜?” </p>
<p><br /></p>
<p>    아빠는 식사를 빨리 마치고 “하~ 잘 먹었습니다”라고 답답한 감정을 표현하며 직감적으로 방으로 피합니다. 엄마는 세윤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p>
<p><br /></p>
<p>    “하다가 그만두면 안 한 것만 못해. 갑자기 그만두면 다 소용이 없잖아. 뭐가 남아? 어? 없잖아.” </p>
<p><br /></p>
<p>세윤이는 뾰로통해서 방에 들어가 억지로 공부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습니다. 갑갑함에 한숨을 쉬며 노래를 듣습니다.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p>
<p><br /></p>
<p>    “나의 꿈이 이뤄지는 날 환하게 웃으세요. 엄마를 생각하면 왜 눈물이 나지. 세상에 좋은 걸 모두 드릴게요. 엄마 사랑해요.” </p>
<p><br /></p>
<p>아이는 눈물을 훔칩니다. 그러며 계속 공부합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크면 엄마와 똑같은 아이가 될 것입니다.  </p>
<p><br /></p>
<p>    엄마는 남편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잃지만, 자녀를 저렇게 키우며 얻는 은전 30냥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딸에게 사랑받을까요? 자신을 이렇게 이용한 엄마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p>
<p><br /></p>
<p>    전교 2등을 하던 학생이 조금만 더 하면 전교 1등 하겠다고 말했던 엄마에게 전교 1등을 한 날 “엄마 됐어?”란 딱 네 자를 유서로 남기고 목숨을 끊은 사건은 유명합니다.  </p>
<p><br /></p>
<p>    엄마는 은전 30냥으로 잃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은전 30냥만 생각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전 30냥으로 잃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엄마도 은전 30냥으로 남편과 자녀의 사랑을 잃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은전 30냥은 가집니다. 물론 사랑을 잃으면 그것도 가치가 없어져 결국엔 유다와 같은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p>
<p><br /></p>
<p>    모든 죄에 기쁨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벗어나려면 그 기쁨을 위해 잃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p>
<p><br /></p>
<p>    은전 30냥은 탈출기에 보면 나의 소가 누군가의 종을 들이받아 죽였을 때 물어주어야 할 값입니다. 성경에서 소는 뱀과 함께 자아를 상징합니다. 나의 자아를 방치하여 누군가의 종을 죽이게 만들 때 드는 돈이 30냥인 것입니다. 하지만 30냥으로 누군가의 종을 죽임으로써 그 주인과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p>
<p><br /></p>
<p>    은전 30냥은 결국 뱀의 말을 따라주면서 얻는 선악과를 뜻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과를 내가 죄를 통해 얻는 은전 30냥이라고 여겨 십일조로 봉헌한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p>
<p><br /></p>
<p>    이스라엘 백성이 섬겼던 금송아지는 결국 모세가 십계명 판을 깨면서 그들에게 먼지로 마셔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아를 섬기는 값이 하느님과의 계약 단절, 곧 관계 단절을 가져옴을 깨닫고는 자신들이 섬겨온 은전 30냥이 그냥 먼지에 불과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p>
<p><br /></p>
<p>    여기 한 지혜로운 아빠 엄마가 있습니다. 아빠는 아이들을 방목하고 엄마는 그런 아빠가 자녀들보다 우선입니다. 아이들보다 남편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아빠가 들어오면 자녀들보다 먼저 아빠를 안으려고 자녀들과 싸우며 뛰어갑니다. 아이들한테서 오는 기쁨보다는 남편한테서 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아는 여인입니다.  </p>
<p><br /></p>
<p>    이번에 서울대에 합격한 붕어빵 지웅이의 부모입니다. 붕어빵에 아빠 정은표 씨와 출연하기도 했던 정지웅 군은 고등학교 때 래퍼로 대회도 나가고 또 서울대에 합격하였습니다. 그가 머리만 좋아서일까요? 어쩌면 좋은 머리도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을까요? 저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자녀의 머리도 좋아진다고 믿습니다. 머리도 써야 좋아지는데, 생존보다는 더 광범위한 시각으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p>
<p><br /></p>
<p>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는 항상 사랑과 은전 30냥과의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사랑을 선택합시다. 물론 그러면 은전 30냥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더 큰 행복인지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사랑을 포기하며 먼지와 같은 순간적인 기쁨을 선택하는 일은 없습니다. </p>
<p><br /></p>
<p> 전삼용 요셉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3T14:43:55+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3일 성주간 수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3</link>
<description><![CDATA[<p>3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해왔던 부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둘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각방을 쓴 지 오래되었고, 결혼생활이 최악이었다고 서로 말합니다. 진작 이혼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에 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때 깨끗하게 갈라지자고 약속했습니다.</p>
<p><br /></p>
<p>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다시 생기게 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남편이 치명적인 암에 걸린 것입니다.</p>
<p><br /></p>
<p>이때부터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서로에 대한 분노는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까지 잘해 주지 못한 미안함,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완고함이 비로소 보인 것입니다. 이제 연애할 때의 감정으로 서로를 위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p>
<p><br /></p>
<p>앞으로 절대 사랑할 수 없다고 했던 그들에게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암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통해 상대방을 새롭게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바뀌어야 사랑이 생기는 것이라, 내가 바뀌어야 사랑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변화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내 주변의 변화가 비로소 찾아옵니다.</p>
<p><br /></p>
<p>예수님도 우리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변화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찾는 변화를 말이지요. 그 안에서 믿음이 나옵니다.</p>
<p><br /></p>
<p>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다.</p>
<p><br /></p>
<p>“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p>
<p><br /></p>
<p>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면서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질문을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넘긴 유다도 똑같이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25)라고 대답하십니다.</p>
<p><br /></p>
<p>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유다와 같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팔아서 자기 세속적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적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가 필요한 지금입니다.</p>
<p><br /></p>
<p><br /></p>
<p>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부르제).</p>
<p><br /></p>
<p><br /></p>
<p>빠다킹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3T14:43:26+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2일 다해 성주간 화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2</link>
<description><![CDATA[<p>나는 살아있는가? 산 사람은 살리고 죽은 사람은 죽인다 </p>
<p><br /></p>
<p>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해하는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p>
<p><br /></p>
<p>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p>
<p><br /></p>
<p>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인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는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후입니다.   </p>
<p><br /></p>
<p>    계명은 누군가의 뜻이고 그 뜻을 따라주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영광을 올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으로 당신에게 영광을 올리면 당신도 미래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
<p><br /></p>
<p>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 </p>
<p><br /></p>
<p>    사랑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면 하느님은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p>
<p><br /></p>
<p>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유다도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p>
<p><br /></p>
<p>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p>
<p><br /></p>
<p>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한다고 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p>
<p><br /></p>
<p>   의사는 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일까요?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또 열심히만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p>
<p><br /></p>
<p>의사 이국종 선생의 아버지는 6·25 때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유공자입니다. 그런데 국가유공자의 자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아 국가유공자 의료 복지 카드를 내밀며 병원을 전전했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고 다 거절당하였습니다.  </p>
<p><br /></p>
<p>    그러다오직 ‘이학산’이라는 외과 의사만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너에게 받을 의료비는 없단다”라며 이국종 어린이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이국종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꿈을 품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라는 삶의 원칙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p>
<p><br /></p>
<p>    이국종 선생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아덴만 작전으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겠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총상이 심해, 마치 떨어지는 칼날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p>
<p><br /></p>
<p>    이국종 선생은 자원하여 그를 살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상태가 심해 그곳에서는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이미 딱딱해지고 팔다리 네 개 중 세 개도 겨우 붙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지혈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국종 선생은 환자를 급하게 이송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환자를 수송할 수 있는 비행기를 빌리는데 4억 4,000만 원이었습니다. 외교부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국가는 여러 절차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이국종 선생은 이송비 4억 4천은 내가 낼 테니 일단 이송하라”라는 말을 하고 이국종이라는 이름으로 비행기를 빌려 한국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석해균 선장은 6개월 만에 두 발로 걸어서 퇴원하였습니다.  </p>
<p><br /></p>
<p>    이렇게 유명세를 치른 이국종 선생 덕분으로 아주대 병원은 유명해졌지만, 진짜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이국종 교수팀이 긴박하게 데려와 살리는 환자가 많아질수록 병원은 적자가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돈으로는 한 사람을 살리는 데 무리가 있었고 그 이후 추가 비용은 병원이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의사들도 자신들이 벌어 좋은 기계를 사야 할 돈들이 다 중증외상센터 적자 메우는 데로 들어간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중증외상센터로 오시는 분들은 다 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경제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국종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수술환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병원은 더 큰 부담을 떠안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잠도 자지 못하며 일하는데 윗사람과 동료 교수들에게 종일 욕을 먹으며 견뎌야 했습니다.  </p>
<p><br /></p>
<p>    가난한 이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의료시스템의 문제를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국종은 결국 권역외상센터 지원 예산 201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변한 게 없었습니다. 7년 동안 고장 난 무전기를 바꿔 달라는 말만 수백 번을 했다며 분노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일개 의사가 세상을 바꾸기에 역부족이라고 여긴 이국종 교수는 결국 아주대병원에 사퇴 의사를 밝히게 됩니다.  </p>
<p><br /></p>
<p>    “한국에서 다시는 이거 안 할 거예요. 이번 생은 망했습니다. 두 번 다신 외상센터에서 근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p>
<p><br /></p>
<p>[출처: ‘이국종 교수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결국 사퇴하고 떠난 소중한 인재’, 유튜브 채널, 그시절 그배우] </p>
<p><br /></p>
<p>    물론 동료 의사들이나 나라 관리들도 살자고 그런 결정들을 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 뜻을 위해 지나치게 에너지를 다 빼버려 소진된 이국종 교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의사지만 결국엔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시스템 속에 갇힌 현실에서 어떻게 두 부류로 갈리는지는 볼 수 있습니다.  </p>
<p><br /></p>
<p>병원과 나라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나와 전혀 상관없고 이익도 안 되는 가난한 이들을 살릴 것인가. 병원을 살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환자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원을 살린다는 것 안에는 ‘내가 살겠다’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병원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만 내가 살겠다는 마음이 조금만 들어있어도 누군가는 죽게 되는 데 협조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p>
<p><br /></p>
<p>    예수님을 죽이려던 이들도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습니다. 가리옷 유다도 그 말에 동의하여 자신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을 넘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안에 ‘그래야 나도 살지!’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나를 죽이려는 뜻이 아니면 실천될 수 없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살려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
<p><br /></p>
<p>    우리가 하는 행위가 다 하느님의 뜻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이웃이 죽는지, 혹은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는 일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이 두 부분에 속하게 됩니다.  </p>
<p><br /></p>
<p>    내가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알아보는 법은 간단합니다. 나의 모든 행위는 누군가는 살리고 동시에 누군가는 죽입니다. 오직 산 사람만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생명이 필요하여 타인을 죽입니다.  </p>
<p><br /></p>
<p>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빛으로 갈 것인지, 어둠으로 갈 것인지는 명확합니다. 빛으로 가는 길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p>
<p><br /></p>
<p>전삼용 요셉 신부</p>
<p><br /></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2T19:50:24+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1일 성주간 월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1</link>
<description><![CDATA[<p>아는 지인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 이 집을 방문한 것이라, 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집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방 하나가 완전히 클래식 음반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워낙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클래식 음반을 사들이는데 돈을 아끼지 않다 보니 이렇게 음반이 많아졌다고 하십니다.</p>
<p><br /></p>
<p>저는 “많은 음반이 있으니 매일 다른 음악을 들으시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음반수가 너무 많아서 늘 선택에 어려움을 느낍니다.”</p>
<p><br /></p>
<p>결국 다양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음악만 듣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몇 년째 자리만 지키는 음반이 대부분이라고 하십니다.</p>
<p><br /></p>
<p>선택지가 많으면 그만큼 다양한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몇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욕심일 따름입니다.</p>
<p><br /></p>
<p>세상을 살면서 너무 많은 선택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용도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라고 하신 이유를 묵상합니다. 우리의 선택을 단순화시켜서 이 사랑 하나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p>
<p><br /></p>
<p>성주간 월요일인 오늘,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는 한 여인을 봅니다. 마리아는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시체를 향유로 발라 염한 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성령에 이끌려 주님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비 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못마땅해하는 말을 합니다.</p>
<p><br /></p>
<p>“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p>
<p><br /></p>
<p>향유의 가격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때, 삼백일 치의 품삯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로 이 돈을 쓴 것입니다. 그에 반해 유다는 세속적인 관점으로 부정적인 말을 한 것이지요.</p>
<p><br /></p>
<p>실제로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깁니다. 은 1냥에 4데나리온에 해당하니, 거의 120일 치의 품삯에 판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 30냥은 당시 노예를 팔 때 받는 가격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노예 취급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었으니, 마리아의 행동을 옳게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p>
<p><br /></p>
<p>사랑에만 집중하면 세상의 기준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집중하다 보면 사랑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p>
<p><br /></p>
<p><br /></p>
<p>오늘의 명언: 누구나 세상을 바꾸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변하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레프 톨스토이).</p>
<p><br /></p>
<p><br /></p>
<p>빠다킹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2T19:49:52+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1일 성주간 월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90</link>
<description><![CDATA[<p>요한 12,1-11 </p>
<p><br /></p>
<p>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p>
<p><br /></p>
<p>내 장례를 위한 준비 </p>
<p><br /></p>
<p>신학생 때 로마에서 유학하는 중에 선배 신부님들과 동유럽 자동차 여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p>
<p>프라하와 부다페스트 등 가보지 못했던 동구권의 분위기에 흠뻑 취할 꿈을 안고 교구차를 몰고 떠났습니다  </p>
<p><br /></p>
<p>아침에 떠나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이태리 북부 아름다운 고산지대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섬광과 같이 무서운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p>
<p><br /></p>
<p>‘앗! 여권을 안 가져왔네!’ </p>
<p><br /></p>
<p>저는 머뭇거리다 이 이야기를 꺼냈고, 순간 선배신부님들의 따가운 시선이 저를 향했습니다.  오랜 준비 끝에 떠난 여행이었지만 제가 여권을 가져오지 않은 바람에 함께 여행하는 우리 모두는 동구권 여행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p>
<p><br /></p>
<p>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무언가 하나가 빠지면 절대 목표에 도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무언가를 먼저 해결하지 못하면 절대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p>
<p><br /></p>
<p>하느님은 당신을 만나러 오면서 맨 손으로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평소에 당신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p>
<p>그런데 만약 우리가 죽을 때 하느님 앞에 섰는데 맨 손이면 어떻게 할까요?  나에게 줄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는데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p>
<p>하늘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p>
<p><br /></p>
<p><br /></p>
<p>포르치움꼴라 천사들의 어머니 성당에 있는 프란치스코에 관련된 벽화에 보면  프란치스코도 예수님 앞에 서서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너무 가진 것이 없어서 구슬 세 개만 꺼냅니다.  그것이 자신이 세운 세 수도원을 뜻합니다. </p>
<p><br /></p>
<p>예수님은 그것으로 넉넉하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p>
<p><br /></p>
<p>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도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귀한 향유를 바르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장례를 위해 바르는 것과 같습니다.</p>
<p>예수님은 당신에게 그런 봉헌을 해 준 이를 부활하시어 가장 먼저 만나러 오십니다.</p>
<p>예수님도 고마운 사람을 먼저 만나고 싶은 모양입니다.</p>
<p>당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 준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p>
<p>마리아가 발라준 것은 향유입니다. 귀한 향유입니다. 사랑이고 봉헌이고 희생입니다.</p>
<p>예수님을 위해서 보여주는 모든 것이 바로 마지막 날을 위한 준비인 것입니다.</p>
<p>간단하게 말하면 ‘미사’와 ‘이웃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p>
<p>미사 안에서 사랑과 희생과 봉헌과 감사와 찬미가 이루어지고, 이웃사랑 안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를 도와주면 예수님께 봉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p>
<p>야곱이 하란을 떠나 에사우를 만나러 올 때 걱정이 심했습니다.</p>
<p>왜냐하면 장자권과 그 복을 야곱이 가로채서 형 에사우가 자신을 해할지 몰라 달아났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p>
<p><br /></p>
<p>장인 라반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얻게 되어 부자가 되었지만 그것이 형의 분노를 식게 할지는 미지수입니다.</p>
<p>야곱은 먼저 식솔들을 많은 선물과 함께 여러 차례로 나누어 보냅니다.</p>
<p>에사우는 야곱을 만나기 전에 이미 야곱 가족의 인사를 받고 야곱의 선물을 여러 차례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p>
<p>결국 에사우가 마지막으로 야곱을 만났을 때는 그런 선물들은 뭐 하러 미리 보냈느냐고 나무라면서 자기는 벌써부터 동생 야곱을 용서했다고 말합니다.</p>
<p>그러나 과연 그 선물들과 인사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을까요? </p>
<p><br /></p>
<p>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지만 우리 죽을 때 만나게 될 하느님께 선물을 미리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p>
<p>그 선물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 때 보내지게 되고</p>
<p>그분은 선물을 이미 많이 받은 채로 우리를 반가이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p>
<p><br /></p>
<p>전삼용 요셉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2T19:49:23+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1일 성주간 월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89</link>
<description><![CDATA[<p>아는 지인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 이 집을 방문한 것이라, 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집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방 하나가 완전히 클래식 음반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워낙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서 클래식 음반을 사들이는데 돈을 아끼지 않다 보니 이렇게 음반이 많아졌다고 하십니다.</p>
<p><br /></p>
<p>저는 “많은 음반이 있으니 매일 다른 음악을 들으시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음반수가 너무 많아서 늘 선택에 어려움을 느낍니다.”</p>
<p><br /></p>
<p>결국 다양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음악만 듣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몇 년째 자리만 지키는 음반이 대부분이라고 하십니다.</p>
<p><br /></p>
<p>선택지가 많으면 그만큼 다양한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몇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욕심일 따름입니다.</p>
<p><br /></p>
<p>세상을 살면서 너무 많은 선택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용도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라고 하신 이유를 묵상합니다. 우리의 선택을 단순화시켜서 이 사랑 하나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p>
<p><br /></p>
<p>성주간 월요일인 오늘,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는 한 여인을 봅니다. 마리아는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시체를 향유로 발라 염한 일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성령에 이끌려 주님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비 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못마땅해하는 말을 합니다.</p>
<p><br /></p>
<p>“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p>
<p><br /></p>
<p>향유의 가격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때, 삼백일 치의 품삯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로 이 돈을 쓴 것입니다. 그에 반해 유다는 세속적인 관점으로 부정적인 말을 한 것이지요.</p>
<p><br /></p>
<p>실제로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깁니다. 은 1냥에 4데나리온에 해당하니, 거의 120일 치의 품삯에 판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 30냥은 당시 노예를 팔 때 받는 가격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노예 취급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었으니, 마리아의 행동을 옳게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p>
<p><br /></p>
<p>사랑에만 집중하면 세상의 기준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집중하다 보면 사랑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p>
<p><br /></p>
<p><br /></p>
<p>오늘의 명언: 누구나 세상을 바꾸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변하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레프 톨스토이).</p>
<p><br /></p>
<p><br /></p>
<p>빠다킹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2T19:48:27+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88</link>
<description><![CDATA[<p>우리가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쓰면 동공이 확장됩니다. 주의력과 집중력이 동공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계산하게 하면 저절로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공은 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동공의 움직임이 생기면 뇌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계산이나 암기할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동공이 확장된다고 합니다.</p>
<p><br /></p>
<p>좋아하는 대상을 보려고 할 때, 또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할 때 동공이 확장됩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뇌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것도 과감하게 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하물며 실천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은 사랑하기와 긍정적인 자세로 사는 것을 굳이 피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렇게 사는 사람의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사랑과 긍정적인 자세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약을 챙겨 먹듯이 말입니다.</p>
<p><br /></p>
<p>오늘 우리는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지요. 그리고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복음은 아주 긴 수난 복음을 읽습니다.</p>
<p><br /></p>
<p>예수님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문득 예수님을 향해 적의를 표현했던 사람들의 눈을 떠올려 봅니다. 과연 어떤 눈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철천지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적의 가득한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과연 그들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을까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거하는 커다란 죄의 무게만을 키웠습니다.</p>
<p><br /></p>
<p>이런 부정적인 마음과 미움의 감정에서 생겨난 행동은 결국 커다란 후회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되지요.</p>
<p><br /></p>
<p>“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2,27)</p>
<p><br /></p>
<p>“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2,48)</p>
<p><br /></p>
<p>우리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우리의 눈 역시 예수님을 부정하는 적의 가득한 눈이 아닐까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하다면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커다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p>
<p><br /></p>
<p>가슴을 치며 후회할 행동은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로도 족합니다. 이제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고 칭찬할 사랑의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p>
<p><br /></p>
<p><br /></p>
<p>오늘의 명언: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항상 슬픈 것.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니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리니(푸시켄).</p>
<p><br /></p>
<p><br /></p>
<p>빠다킹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1T09:11:42+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10일 다해 사순 주님 수난 성지 주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87</link>
<description><![CDATA[<p>왜 하느님은 우리를 낮추시는가? </p>
<p><br /></p>
<p>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성전으로 입성하십니다. </p>
<p><br /></p>
<p>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38) 이라고 노래합니다. 주님께 임금님으로 임명되어 우리에게 오시는데, 그분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p>
<p><br /></p>
<p>그런데 이런 상황을 기뻐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p>
<p>바리사이들은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루카 19,39)라고 말합니다.</p>
<p>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라고 하시며,  슬픈 마음으로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p>
<p><br /></p>
<p>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중략)</p>
<p>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2.44)라고 한탄하십니다. </p>
<p><br /></p>
<p>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p>
<p>하나는 나의 겉옷을 그분 밑에 까는 것이고 하나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찬미하는 것입니다.</p>
<p>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p>
<p><br /></p>
<p>오늘 복음의 짝을 구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솔로몬 임금의 즉위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1열왕 1장 참조). </p>
<p><br /></p>
<p>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자기 대를 이을 임금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가 사람들을 규합하여 왕이 되려 합니다.</p>
<p>현 상황으로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다윗 임금도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p>
<p><br /></p>
<p>하지만 나탄 예언자와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가 청원하자 다윗은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곧 자기 나귀에 솔로몬을 태워 샘이 있는 기혼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을 분 다음 “솔로몬 임금 만세!”하고 외치게 하였습니다.</p>
<p>그리고는 나귀를 타고 임금의 왕좌까지 올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p>
<p><br /></p>
<p>“모든 백성이 그의 뒤를 따라 피리를 불고 올라가며 큰 기쁨에 넘쳐 환호하였는데, 그 소리에 땅이 갈라질 지경이었다.”(1열왕 1,40) </p>
<p><br /></p>
<p>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 찬미 소리를 듣고 아도니야는 겁을 먹고 성전의 뿔을 잡고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p>
<p>아도니야는 결국 다윗을 시중들던 여인을 솔로몬에게 청했고 솔로몬은 계속 왕위를 노리는 것 같은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아도니야는 왕권을 강탈하려는 자였고 시민들의 찬미 소리에 질겁하고 결국 솔로몬의 왕국에서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p>
<p><br /></p>
<p>카인의 제물이 왜 하느님 앞에 기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그의 제물이 정성스럽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p>
<p>그런데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십일조를 상징하는 겉옷을 까는 사람들의 찬미 소리가 우렁차게 올려졌습니다.</p>
<p>그래야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예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인은 제물은 바치되 기쁘게 찬미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쁘게 드리지 못하는 예물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지, 그분의 것을 기쁘게 돌려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p>
<p><br /></p>
<p>기혼 샘은 본래 예루살렘 외곽 아래쪽에 있었습니다.</p>
<p>그곳에서 기름을 부으라는 말은 겸손해져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란 뜻입니다.</p>
<p>그리고 그 아래에서부터 주님을 찬미해야 모든 예루살렘 시민이 들을 수 있습니다. 겸손과 봉헌은 하나입니다.  </p>
<p><br /></p>
<p>만약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고 “아빠도 하나만 줄래?”라고 할 때, 아빠는 다음에 또 과자를 사주고 싶을까요?</p>
<p>기쁘게 주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을 것입니다. 아빠를 아빠로 인정한다면 기쁘게 과자를 내어주고 아빠가 좋다고 소리쳐야 합니다. 그러면 아빠에게 다 얻을 수 있습니다. </p>
<p><br /></p>
<p>이와 같은 일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참 왕이신 하느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습니다. 계약의 궤를 모셔 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도 옷을 다 벗고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왕의 행세를 하지 않고 그분 앞에서 벌거벗은 어린이가 된 것입니다. </p>
<p><br /></p>
<p>이때 그의 아내 미칼은 이렇게 비웃습니다. </p>
<p>“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2사무 6,20)</p>
<p>미칼은 사울의 딸로서 다윗이 위험할 때 그것을 다윗에게 알려주어 다윗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p>
<p><br /></p>
<p>하지만 미칼은 여전히 다윗 위에 서 있으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p>
<p>“주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p>
<p>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p>
<p>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저 여종들에게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오.”(2사무 6,22  결과는 이렇습니다. </p>
<p>“그 뒤 사울의 딸 미칼에게는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2사무 6,23) </p>
<p><br /></p>
<p>이스라엘 여인에게는 자녀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수치입니다. 아도니야와 같이 왕권을 노리다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p>
<p>왕 앞에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낮아져 천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춤추며 찬미하는 것입니다.  </p>
<p><br /></p>
<p>그러나 우리 미사 때 이렇게 합니까?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보다 더 근엄합니다.</p>
<p>찬미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거나 율동까지 한다고 하면 비천한 모습이라고 꺼리는 신자들도 있습니다.</p>
<p>오늘 그러면 안 됩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서 우리 안에서 자아의 압제를 이기고 당신이 평화의 왕이 되시는 날입니다. 그러니 팔마가지를 마음껏 흔들고 힘껏 찬미해야 합니다.</p>
<p>그리고 매 미사가 그래야 합니다. </p>
<p><br /></p>
<p><br /></p>
<p>미사 때 하는 봉헌이 우리 겉옷을 까는 것이고 그것과 함께 기쁜 찬미가 울려 나와야 합니다.</p>
<p>그다음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분, 곧 성체를 우리 안에 모셔 우리 왕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p>
<p>자신을 낮추고 찬미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그 사람을 맞아들여도 왕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p>
<p>이미 자신을 왕으로 삼고 있기에 새로운 왕 앞에서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p>
<p>베르나데트는 지금은 큰 성지가 된 루르드 한 지역에서 성모님을 만납니다. </p>
<p><br /></p>
<p>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가서 마신 다음에 몸을 씻으라고 지시했습니다.</p>
<p>베르나데트는 그대로 했고 주변 사람들은 베르나데트가 미친 줄 알았습니다.</p>
<p>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그 구렁텅이를 손으로 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솟아 나왔습니다.</p>
<p>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바른 사람들이 치유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많은 기적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p>
<p>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p>
<p>왜 성모님은 기적을 주시기 전에 사람을 저렇게 낮추실까요</p>
<p>우선 당신을 왕으로 영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왕으로 영접한다는 말은 자신을 종으로 낮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기쁘게 낮춘다는 말입니다.</p>
<p>나로 사는 것보다 그분의 종으로 사는 것이 훨씬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p>
<p>그렇게 당신께 자신을 봉헌하며 기쁘게 찬미할 줄 안다면 주님은 그 사람을 통해 많은 이를 치유하게 하십니다.</p>
<p>특별히 봉헌 시간에 더 크게 찬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강론 후에 기쁨의 찬미를 바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p>
<p><br /></p>
<p>필립보 네리가 한 성녀라고 불리는 수녀님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비가 와서 신발이 지저분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녀님을 불러 신발을 닦으라고 시켰습니다.</p>
<p>그랬더니 그 수녀는 자신을 뭐로 아느냐며 거부하였습니다.</p>
<p>필립보 네리는 돌아가서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p>
<p>“그곳에는 성인이 없습니다.”</p>
<p>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낮추실까요? 더 주시기 위해서입니다.</p>
<p>유치원 다녀온 아이가 배운 춤을 부모 앞에서 춘다면 부모는 얼마나 기쁩니까?</p>
<p>더 부끄럽게 소리높여 찬양합시다.</p>
<p>이것이 부모에게 더 내어놓는 자세이고 더 받을 자세입니다 </p>
<p><br /></p>
<p>전삼용 요셉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11T09:11:15+09:00</dc:date>
</item>


<item>
<title>2022년 4월 9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title>
<link>https://banghak.or.kr/bbs/board.php?bo_table=zbove_27&amp;amp;wr_id=86</link>
<description><![CDATA[<p>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p>
<p>복음: 요한 11,45-56 </p>
<p><br /></p>
<p>하느님 백성의 무류권 </p>
<p><br /></p>
<p>축음기 영사기 전구 등 무려 1300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은 에디슨(1847~1931)도 생애의 말년에는 특유의 외고집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p>
<p><br /></p>
<p>70세가 넘어서도 잠자는 시간이 하루 4시간에서 5시간으로 늘었을 뿐  여전히 일에 열중했지만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p>
<p><br /></p>
<p>그 이유는 자신의 축음기 회사에 과도한 애착을 느낀 나머지  시대가 요구하는 라디오방송이나 레코드플레이어의 시장성을 무시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습니다. </p>
<p><br /></p>
<p>에디슨은 “사람들은 라디오 방송국이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에 곧 싫증내고 우리 회사의 축음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p>
<p><br /></p>
<p>세 아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다 끝내 고집을 꺾지 못하자</p>
<p>몰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 제조에 나셨다가 에디슨의 격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p>
<p><br /></p>
<p>70대 후반이 돼서야 에디슨은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축음기 생산을 그만두고 라디오 제조에 나셨으나 다른 회사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결국 2년 후 2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공장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p>
<p><br /></p>
<p>물론 내가 확신하는 것에는 목숨을 걸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순교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p>
<p>그러나 어느 선까지 확신으로 목숨을 걸어야 할까요? </p>
<p><br /></p>
<p>에디슨은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혼자만 고집하다가 말년에 실패만 거듭하는 우울한 삶을 살았습니다. </p>
<p><br /></p>
<p>철새는 때가 되면 온도가 적당하고 먹이가 풍부한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위가 오고 먹을 것이 없어 죽고 맙니다.</p>
<p>그런데도 혼자만 남아있겠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p>
<p>철새 대부분 안에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그래야만 한다’는 ‘공통된 뜻’이 들어있습니다. 결국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외롭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
<p><br /></p>
<p>1942년 세계 제2차 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는 그 추운 겨울날 30만 명의 독일 군에게 모스크바를 침략,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불가능하다는 참모진들의 말에도아랑곳하지 않은 히틀러는 자신의 명령이 취소될 수 없음을 주장했습니다. </p>
<p><br /></p>
<p>결국 독일군은 넉넉하지 못한 식량과 매서운 추위에는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무기를 가지고 진격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군은 20만 명이 전사하고 9만 명은 포로가 된 치명적 패배를 당했습니다. 살아 돌아온 병사는 겨우 6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p>
<p><br /></p>
<p>그렇습니다. ‘나와 같은 운명을 함께하는 이들 전체’가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그 땐 나의 확신을 접는 것이 좋습니다. 히틀러의 결정을 반대하던 이들은 적인 러시아군들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아군들이 모두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p>
<p><br /></p>
<p>같은 편이 다 반대하는 것을 혼자 밀어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은 확신을 넘어선 고집과 아집이 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p>
<p><br /></p>
<p>에디슨도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고집이 세어졌던 것 같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자신을 따라와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p>
<p><br /></p>
<p>그러나 철새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자신도 그 무리에 함께 끼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의 결정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남들이 아닌 바로 아내와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를 위하는 사람들이 모두 반대하는데 고집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p>
<p>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p>
<p><br /></p>
<p>바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p>
<p><br /></p>
<p>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입니다.” </p>
<p><br /></p>
<p>유다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편이라면 그들을 따를 줄도 알았어야 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아집으로 예수님을 없앨 방법만을 찾습니다.</p>
<p>이는 자신들이 그 백성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p>
<p><br /></p>
<p>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의 무류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즉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한 목소리를 낸다면 그것엔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p>
<p>성령님께서 작용하시기 때문입니다.</p>
<p>따라서 모든 백성이 이젠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미사를 하는 것을 원한다면그것을 따라 주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싫어서 교회를 등지고 끝까지 라틴어 미사를 고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p>
<p><br /></p>
<p>그리스도교가 급속도로 확산되자 유다 지도자들은 본격적으로 그들을 박해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때 가믈리엘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p>
<p><br /></p>
<p>“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p>
<p>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p>
<p>그렇습니다. 그렇게 유다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거부했기에  하느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되어버렸습니다.</p>
<p>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우리 마음을 이끄십니다. 앞으로도 어떻게 우리를 이끌지 모릅니다. </p>
<p><br /></p>
<p>혼자만 고집부리며 자칫 하느님의 이끄심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주위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p>
<p><br /></p>
<p>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는 곧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p>
<p><br /></p>
<p>백성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편이 모두 원한다면 그것을 따라줄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p>
<p><br /></p>
<p>전삼용 요셉 신부</p>]]></description>
<dc:creator>안토니오</dc:creator>
<dc:date>2022-04-09T09:52:06+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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