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7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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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동학대라고 하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실험이겠지만, 13세기 독일의 프레드릭 2세는 아이를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완벽히 차단해서 키우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언어를 말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안아주지 않고 말도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말을 할 나이가 되기 전에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 비윤리적인 실험이었지만, 신체적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친밀하고 행복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우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육체적으로는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어도, 감정적으로는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안에서만 그럴까요? 이렇게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하느님 앞에 서서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오늘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은 여기서 모든 백성을 심판하는 임금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앞에 세상을 살아온 모든 백성이 서게 되고, 각자 믿음과 그 실천에 관하여 심판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사람을 대하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임금이신 주님은 자신에게 하는 것보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을 자신에게 해 준 것으로 여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이렇게 강조합니다. 오늘 독서의 레위기는 이렇게 말하지요.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5)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레위 19,17)
우리 주변에는 우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이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곧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자신과 이루는 모든 관계는 나를 살게 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관계를 끊으려고 하십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이런 식을 끊어버리면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주님 앞에서도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관계 중에 하나를 끊으면 또 다른 관계를 끊는 것도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계속 관계를 끊다 보면, 심지어 주님과의 관계도 끊게 됩니다.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실까요?
오늘의 명언: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갖는 것이다(칸트).
빠다킹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