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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7일 다해 사순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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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는 ‘라자로’란 이름으로 살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이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아 지옥에 갔고 거지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아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나쁜 것만 받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의 핵심은 ‘라자로’란 이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이름이 나오는 것은 여기에서 라자로가 유일합니다. 그러니 라자로란 이름이 분명히 이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라자로는 히브리어 이름 ‘엘아자르’의 그리스식 이름, ‘라자로스’입니다. ‘엘아자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뜻입니다.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하느님께서 도우심을 믿고 사느냐, 자기 힘으로 사느냐’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의 상황이 부자의 상황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생존을 책임지려는 상태입니다. 생존을 위해 고생해야만 한다는 파라오에 속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상태라면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신데 어떻게 내일 걱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일 걱정을 하는 사람이 약탈자가 됩니다.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 홍해를 건너는 순간입니다. 홍해를 건넘은 곧 세례입니다. 세례는 새로 태어남인데 그때 받는 이름이 ‘라자로’입니다.  


    세례를 받았으면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합니다. 그 신앙고백을 우리는 ‘십일조’ 봉헌으로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라자로’란 이름을 지녔다면 선악과를 주님께 봉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도와주심을 믿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 했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잘 압니다.  


    이름은 본성을 의미합니다. 라자로는 천국으로, 부자는 지옥으로 가는데 그사이는 절대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습니다. 그 구렁텅이가 본성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조금씩 하느님 자녀의 본성과 사탄 자녀의 본성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라자로’란 이름은 표징을 보고 믿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선택입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죽은 이가 부활하는 기적을 보아서가 아니라, 믿음은 말씀을 듣고 내리는 ‘결단’이란 뜻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대만 영화 ‘네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다 – 필수 ADHD’는 성적이 떨어지면 아이들이 소각되는 이상한 미래를 상상한 영화입니다. 이 시대는 자녀의 공부로 부모의 지위가 결정됩니다. 엄마는 첫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인공수정으로 딸을 얻습니다. 그리고 좋은 집에 삽니다. 하지만 딸은 머리가 안 좋아 공부를 못 합니다. 만약 딸이 성적이 떨어지면 딸은 소각되고 엄마는 하층민으로 내려앉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딸을 ADHD로 믿게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딸은 그나마 이런 연기도 제대로 못 합니다. 그래서 소각당한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때 딸에게 어떤 하층민 아주머니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처럼 거지로 사는 것이라 말합니다. 경쟁의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부자로 살아서 가난한 생활은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갔고 그렇게 노력하다가 결국엔 소각되고 어머니는 또 다른 아이를 인공수정으로 임신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키웁니다.  


    여기서 엄마는 자아를 나타냅니다. 자아는 생존하기 위해 편안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를 다그칩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고 성적이 좋아져 봐야 엄마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렇게 본인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잃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 부자의 삶입니다. 선택하면 됩니다. 가난하게 살아도 자아의 종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반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어머니는 다릅니다. 포레스트는 불편한 다리와 아이큐 75밖에 안 되는 머리를 지닌 외톨이 소년입니다. 그의 헌신적이고 강인한 어머니는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초콜릿을 꺼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포레스트는 따돌림을 당해 도망치다가 자신이 잘 달릴 줄 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풋볼선수가 됩니다. 그리고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서도 많은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 됩니다. 동료를 위로하겠다고 탁구를 치다가 훌륭한 탁구선수가 됩니다. 이어 군 동료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새우를 잡다가 큰 사업가가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자녀를 낳아 잘 기르는 누구보다 훌륭한 가장이 됩니다. 


    포레스트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인생은 알 수 없으니 가는 대로 맡기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잘됩니다. 사실 포레스트가 오늘 복음의 ‘라자로’일 수 있습니다. 거지로 살더라도 먹을 것이 있으니 그냥 오늘 해야 하는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뛰어야 한다면 뛰고 탁구를 쳐야 한다면 치며 군대에 가야 한다면 가고 일해야 한다면 합니다. 그는 돈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나에게 주어지는 매일매일의 초콜릿 맛은 다를지라도 항상 달콤한 초콜릿이라는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았기에 그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믿음을 가진 라자로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에서 낯선 곳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소방서와 같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무작정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방대원이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아무개 성당으로 전화 걸어 보세요. 제 이름과 세례명을 대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비록 꿈속이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로, 한 성당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것에 매우 자랑스러웠고 자신감이 생겼다고 합니다. 깨어나서도 그 뿌듯한 마음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당시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이 있는데 왠지 그런 것들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으면 하느님께서 ‘라자로’란 이름으로 사는 우리를 보증해 주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돈이 없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냥 빌리기만 해도 주님께서 보증해 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게 편하겠습니까?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한 인생 살다 갑니다.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 힘으로 생존을 책임지려 하다가는 히틀러나 카다피, 혹은 푸틴처럼 이 세상 것을 다 가져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으면 거지로 살더라도 개에게 자기 종기까지 핥게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내어줄 것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 주시는데 못 줄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 평화는 믿음에서 나오는데 그 믿음은 그저 나의 ‘선택’인 것입니다. 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할 때 그때가 비로소 참 ‘세례성사’를 받은 것이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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