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일 다해 사순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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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걱정이 없을 때만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다>
오늘 복음도 ‘초막절’ 축제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남다른 초막절을 지내러 올라가십니다. 초막절의 핵심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깨닫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을 제대로 지내면 이 세상은 여행지일 뿐입니다. 심판의 장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초막이나 성막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의 집, 곧 성막을 향하는 모세와 같습니다. 그 성막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고 또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명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초막을 그리스도 성막으로 삼아야 합니다.
초막절은 초막에 주님 은총의 물이 부어지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정한 초막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초막절에 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실로암에서 물을 떠서 제단에 붓는 예식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본래 비가 오기를 바라는 가나안 땅의 예식이었을 것이지만, 이것이 유대교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요한은 이 예식이 곧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9)라고 하며, 초막절은 그리스도라는 실로암에서 성령을 길어 우리 제단에 뿌리는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대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야훼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비는 유목민들에게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초막이십니다. 그 초막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의 피와 물로 우리가 풍성해져서 그분께 제물을 바치는 온전한 제단이 됩니다.
초막이 그리스도인들임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니면 마치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 없이 광야에서 말라 죽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병사들이 예수님을 잡아 오지 못한 것에 대해 나무랍니다. 그리고 성경에 메시아가 다윗 후손이고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에 적합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멍청하게도 예수님을 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왜 어리석은 실수를 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적일까요? 인간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이 이성적이라면 모두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감정의 노예일 뿐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초르노바이우카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같은 방식으로 똑같이 열 번 공격해 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군이 아주 손쉽게 그들을 열 번 모두 이겼기 때문입니다. 이 공격으로 러시아 장군 두 명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러시아군은 이미 그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똑같이 들어와서 똑같이 폭탄을 맞았습니다. 그것도 열 번이나. 합리적으로 생각했다면 두세 번 같은 자리에 같은 포탄이 떨어지면 그다음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었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납니다. 마치 자신이 타는 줄 모르고 계속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습니다. 사실 푸틴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현명한 지도자의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파멸시키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자기 머리를 믿는 것입니다. 머리는 다만 감정의 종일뿐인데 말입니다.
인간이 멍청해지는 이유는 생존 욕구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존 욕구 때문에 생존하는 것보다 생존을 잃게 되는 것을 더 겁냅니다. 그래서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지금 1,000만 원을 드리거나, 혹은 여러분 중 추첨하여서 한 달 뒤에 80%에게 2,000만 원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은 지금 당장 1,000만 원을 받는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컴퓨터에 물어보면 20%의 위험을 감수하고 2,000만 원에 도전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그 받는 기댓값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심리학자이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인간이 경제활동에서도 멍청함을 실험으로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을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낍니다. 조금 덜 갖더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속 육신 마귀에 빠진 사람은 더는 그 욕망을 통제할 전전두엽이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전전두엽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욕구를 통제하는 부위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이런 장면을 목격합니다. 아침마다 독일 병사들은 일부러 그러는지 밖에서 고기를 끓입니다. 굶주림에 지친 한 사람이 대열을 이탈해 그 냄새 나는 곳으로 갑니다. 사람들이 말려도 독일군들이 총구를 들이대도 소용없습니다. 한 번이라도 고기를 먹으면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죽었습니다.
인간은 이렇듯 멍청한 선택을 합니다. 그 이유는 욕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욕구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실제로는 더 큰 손해를 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현명해지는 길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의 환경이 항상 풍족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곳이 초막입니다. 에덴동산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피가 부어집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부유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농부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었으며, 맏아들은 군인 ‘세묜’, 둘째 아들은 배불뚝이 장사꾼 ‘타라스’, 셋째 아들은 바보 ‘농부’지만 성실한 ‘이반’, 막내딸은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이나 ‘눈썰미 좋은’ ‘말라니야’였습니다. 자식들이 장성하면서 아버지는 세 아들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공평하게 3분의 1로 분배했습니다.
군인, 세묜과 장사꾼, 타라스는 집을 떠나서 독립한 이후, 각각 사치스러운 귀족의 딸과 상인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군인 세묜은 아내의 사치를 감당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장사하는 타라스는 더욱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아버지를 찾아와서 남은 재산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남은 재산은 ‘이반의 몫’이라고 말했지만 두 형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인 이반과 벙어리인 말라니야가 재산을 가져봐야 무엇하냐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이반은 흔쾌히 형들에게 자신의 몫으로 남은 재산들을 반씩 준 다음, 홀로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님과 말라니야를 돌보며 살아갔습니다.
한편 지하에서 살아가던 악마는 이들 삼 형제가 서로 싸우지 않고 지내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하들인 작은 악마 세 마리를 보내서 이반 형제들의 사이를 나쁘게 만들 것을 명령했습니다. 첫째 악마는 세묜에게 가서 호승심을 불려놓아 인디아와 괜한 전쟁을 벌이게 한 다음, 화약에 물을 적셔서 못 쓰게 만든 후 전쟁에 지게 했습니다. 둘째 악마는 타라스의 욕심을 부리게 해 물건들을 잔뜩 사들이게 한 다음, 그것들을 모두 거름으로 만들어서 채무자들에게 쫓기는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세묜과 타라스는 계략에 말려들어서 그동안 쌓았던 지위와 부를 잃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반을 맡았던 셋째 악마는 이반의 농사를 방해하였지만, 그때마다 이반은 포기하지 않고 농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악마가 잡혔습니다. 이반은 흙 속에 나무뿌리라도 새로 돋아났나 싶어서 흙 속에 손을 넣었다가 작은 악마를 잡아 올렸습니다. 이반이 질겁하며 악마를 돌에 내리쳐 죽이려 하자 악마는 목숨만은 살려 달라면서 원하는 소원을 들어준다 했습니다. 이반은 무슨 병이든 치료하는 ‘풀뿌리’와 짚단을 ‘군사’로 바꿀 힘, 나뭇잎을 비벼 금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이반은 자신의 무엇이든 고치는 풀뿌리로 중병에 걸린 공주를 고쳐주고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합니다. 이번엔 마귀 왕이 찾아와 꾑니다. 군대를 보강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머리를 써야 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머리는 그저 내가 선택한 주인이 자아내는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이반 임금처럼 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언제든 군사를 만들 수 있고 언제든 나뭇잎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쥐어박던 나이 많은 악마는 술집에 술이라도 한잔하러 들어갔는데, 손에 굳은살이 안 박였다고 쫓겨나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악마는 음식을 먹지 못해 배고픈 상태에서 망루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머리로 일하는 법을 알려주겠다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떨어져 머리가 깨져 죽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무도 없습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추구하는 욕구가 합리적임을 증명하려고 하지 그 욕구가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판단력 부족은 내 안의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공부를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똑똑한 마귀가 될 뿐입니다.
생존을 위해 머리를 쓰면 이성도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머리가 생존만을 위해 사용되면 동물의 수준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은 그저 나의 감정을 따를 뿐입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머리를 쓰지 않으려면 초막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곳에서는 생존을 위해 머리를 쓸 필요가 없어서 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초막에는 물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바보라 불리겠지만 초막에 머무는 이들은 가진 것이 충만하여 머리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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