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8일 다해 사순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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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분명 ‘십일조’ 봉헌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감사한 분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첫 조상들은 ‘생명 나무’를 먹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사실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지옥인데, 하느님께서 사시는 곳이 에덴동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가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어떤 사람은 누구에게 조금 주다가 상대가 그것을 줘봐야 고마워할 줄 모르면 바로 주는 것을 그만둡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분은 그래도 다 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출을 바치지 않고 하인들까지 죽이는 그들에게 아드님까지 주십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영화 ‘해바라기’(2006)는 그냥 단순히 한 명의 깡패 영화 같은데 지금까지 남는 여운이 있습니다. 무언가 묵직하게 가슴을 누릅니다. 어쩌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하는 우리의 결말을 미리 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개로 이름 날렸던 오태식이 주인공입니다. 조폭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한 명을 죽이고 교도소에 갇힙니다. 그런 오태식에게 죽임당한 남자의 어머니 양덕자가 면회를 오고 오태식은 그녀에게 감화돼 개과천선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자기 새어머니로 삼습니다.
오태식은 10년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목표를 수첩에 적으면서 출소 후 지키겠다 다짐합니다. 특별히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이상 세 가지는 새엄마 양덕자가 꼭 지켜달라고 한 것입니다.
한편 오태식이 수감된 중에 마을을 차지하려던 병진이 시의원 조판수와 마을을 접수하고 오태식의 똘마니 양기와 창무도 조판수 밑에 들어갑니다. 오태식이 출소하자 그들은 모두 긴장합니다. 시의원인 조판수는 마을 일대를 재개발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양덕자가 해바라기라는 식당을 하고 있었고 오태식이 그 집에서 살게 되는데 개과천선하려는 그의 마음과 달리 주변 사람들은 그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태식은 새엄마의 말대로 절대 싸움을 하지 않고 맞아주기만 합니다.
조판수 패거리가 양덕자의 해바라기 식당을 부수며 모녀를 위협하고 오태식이 일하는 카센터까지 가서 집단 폭행해서 사장의 팔을 부러뜨립니다. 이에 양덕자가 조판수를 찾아가 자신이 아들이 쓴 일기장 복사본을 보여주며 엄포를 놓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조판수가 양덕자 아들에게 시킨 안 좋은 일들이 다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조판수는 멈추지 않습니다. 양덕자의 딸 희주가 벽돌에 맞아 얼굴을 다칩니다. 그러자 결국 양덕자는 식당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오태식은 조판수를 찾아가서 함께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더는 건들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조판수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던가?”라고 하며 그 대가로 태식 오른손의 힘줄을 끊으라고 시킵니다. 병진이라는 형이 그의 힘줄을 끊는 시늉만 합니다.
집도 내어주어 쇼핑몰을 짓게 하고 가장 싸움 잘하는 아들의 손목의 힘줄도 자르고 딸의 얼굴도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나 조판수에게 여전히 양덕자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자기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기를 시켜 양덕자를 죽입니다.
조판수는 나이트클럽에서 자축 파티를 하고 있었고 오태식은 자신의 다짐을 깨고 조판수를 찾아갑니다. 술도 마시고 새엄마의 영정 앞에서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싸우지 않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10년 동안 울면서 후회하고 다짐했는데,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더군.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벌을 주겠다.”
희주를 급습한 놈을 찾고 오태식은 병진에게 나가 있으라 말합니다. 병진은 태식의 힘줄을 끊지 않고 상처만 내 준 사람입니다. 그후 그곳은 쑥대밭이 됩니다.
이야기의 개연성도 부족하고 비현실적이지만 왠지 태식이 그렇게 하는 것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수는 자기 손목과 어머니 집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까지 죽였으니 더는 그 집에 살 수 없게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가 제가 어렸을 때 길거리 아이를 데려와 씻겨주고 재워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 아이를 계속 키우실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우리 삼 형제가 학교 간 사이에 돼지 저금통을 다 털어 도망가버렸습니다.
이것만 해도 함께 살 수 없을 텐데, 만약 저희까지 해를 끼쳤다면 어떨까요? 아들 중 하나를 죽였다면 그래도 어머니는 그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면 괜찮겠지만, 다 주고도 생명과 같은 존재까지 빼앗는 벌을 받으면서 자기 집에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강도에게 집을 빼앗기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소출을 봉헌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태수는 자신을 받아 준 새어머니에게 신발을 사드렸습니다.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그렇게 그곳에 살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려고 하면서 어머니까지 죽인다면 그건 아닙니다.
인도에서 부부가 20원 때문에 싸우다가 남편이 아내를 죽인 사건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결국 하느님까지 죽이는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감사의 십일조를 하지 못하면 이런 형국까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못된 소작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가 되면 소출 일부를 주님께 감사히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지만, 태아가 엄마 배를 갉아 먹는다면 그 태아는 더는 그 배에서 살 수 없습니다. 에일리언 영화에서 에일리언은 인간을 숙주로 새끼를 사람 몸에서 키웁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에일리언 새끼를 몸속에서 빼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하느님 몸속에서 그분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 살려면 최소한의 감사의 표시를 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이를 가지게 된 것의 십분의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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