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6일 다해 사순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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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비교하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법>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한 것에 대해 이미 자신만만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행위로 의로워졌다면 기도는 왜 하는 것일까요? 기도의 목적이 의로움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 세리는 기도하러 들어오기 전에는 의롭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래서 세리는 의로워졌습니다. 기도를 통해 얻는 열매가 의로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움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어야 의로워집니다. 마치 야곱이 에사우의 의로움을 입어 의롭게 인정받았듯이,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워지려는 이는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를 무시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워지려 하는 사람의 특징은 이웃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이미 의로워서 다른 이를 판단하는 자에게 기도는 의미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판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을 하느님과 비교하지, 인간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나를 비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앞에 하느님 모습을 놓고 사는 사람과 인간의 모습을 놓고 사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놓고 사는 것 자체가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웃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머물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자신을 인간과 비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합니다. 에사우의 옷을 입은 야곱의 비교 상대는 이제 에사우밖에 안 남게 됩니다.
단편 영화 ‘어 버츄얼 나이트메어’(A Virtual Nightmare)의 내용입니다. 번역하자면 ‘가상현실의 악몽’정도가 되겠습니다. 주인공은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였습니다. 친구와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가상현실 VR 게임기가 TV에 나왔습니다. 가격을 보니 그것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달러에 그 기계를 판매하는 사이트가 있었습니다. 속는 셈 치고 주문하였는데 정말 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절친과도 공유하고 함께 게임을 시작합니다.
폐건물에서 하는 게임이었는데 각자의 무기를 고르고 괴물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괴물과 마주쳤을 때 그것과 싸우다 보니 자기 몸에 정말 상처가 나고 아픈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라 실제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게임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한번 시작했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게임이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들과 맞서 싸우며 괴물을 처치하였습니다.
또 한 괴물이 달려들자 그는 그 괴물을 무기로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거울이었습니다. 그는 깨진 조각으로 자기 모습을 비춰보았습니다. 자기가 사람인 줄 알았더니 괴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죽인 괴물들은 실제로 자신과 함께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절친도 이 건물에 함께 있는 것을 알았지만 알아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울 조각을 들고 다니기로 합니다.
그런데 친구는 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매우 높은 단계까지 올라 무기도 매우 강력해졌습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주인공에게 덤빕니다. 거울로 그 친구가 자신도 괴물임을 알려주려 하지만 그는 믿지 않고 거울 조각을 또 깨버립니다. 다행히 주인공은 친구를 이깁니다. 그러나 친구를 죽이지 않고 다시 깨어나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꽁꽁 묶어놓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무기를 버립니다. 그랬더니 프로그램에 오류가 생깁니다. 주인공이 그 자리로 자리를 옮기자 다행히 게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게임기를 부숩니다. 그리고 자기 친구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깨닫습니다. 자기가 친구를 묶어놓고 왔다는 것을. 친구는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짧고 잔인하지만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기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기도는 거울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면 나 자신도 자신이 판단하던 사람들과 똑같이 괴물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무기를 휘두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거울을 보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괴물들이라 여기며 자기가 한 행위, 곧 그 무기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바리사이는 여전히 무기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남을 심판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하느님께 자비만을 청합니다. 그래서 의로워진 것입니다. 남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을 어떤 모습으로 보며 살아가는지에 따라 기도의 열매가 맺혔는지, 맺히지 않았는지가 결정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인지, 아닌지가 결정됩니다.
왜 남과 비교하게 될까요? 하느님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없을 때는 형제들끼리 비교합니다. 유산을 두고 싸웁니다. 그러나 부모가 살아있을 때는 자신을 부모와 비교하기 때문에 형제들끼리 싸우는 일이 드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교하지 않으면 형제와 비교하게 되어있습니다.
비교는 생존 욕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기려는 경쟁의식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부모 앞에서 형제간에 서로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투하고 싶다면 하느님과 비교하지 않고 살면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비교하고 질투하고 열등감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나를 작게 만드는 부모이신 하느님을 앞에 두고 산다면 그런 부모님이 계신 데 서로 살아보겠다고 아웅다웅하는 형제들이 불쌍해 보입니다.
카인과 아벨을 생각해 봅시다. 아벨은 하느님과 비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카인은 형제와 비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비교하지 않으면 저절로 형제와 비교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과 비교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사랑에 비해 내가 그 보답을 하찮게 하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라면 이웃과 비교하여 덜 가진 것에 대해서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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