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7)[강원경제신문-202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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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재원(丁載遠)의 부실(副室) 서모 김씨(庶母金氏)는 향년(享年) 60세를 일기(一期)로 세상(世上)을 떠나기 전에 정약용(丁若鏞)을 볼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하며, 이러한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사암(俟菴)도 서모 김씨의 별세(別世)를 슬프게 생각했을 것이다.
한 인물(人物)의 성장 과정(成長過程)에 있어서 스승의 존재(存在)는 매우 중요한 역할(役割)을 하는데 그렇다면 어린 시절(時節)부터 천부적(天賦的)인 두각(頭角)을 나타냈던 정약용의 스승이 누구였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정약용은 불과 4세라는 어린 연령(年齡)에 부친(父親)으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0세부터 부친이 관직(官職)을 역임하지 않았던 5년동안 경전(經典)을 비롯해 사서(史書)와 고문(古文)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정약용의 중형(仲兄)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수제자(首弟子)였던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사암은 부친 이외에 스승이 없었던 것일까?
이 문제(問題)와 관련된 단서(端緖)를 풀 수 있는 인물이 있으니 정약용 못지 않게 천재(天才)로 널리 알려졌던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의 종조부(從祖父) 이익(李瀷)이다.
이익은 지봉(芝峯) 이수광(李晬光)과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과 함께 실학(實學)의 선구자(先驅者)로 알려진 인물이다.
본관(本貫)은 여주(驪州)로서 부친 이하진(李夏鎭)이 평북 벽동에서 유배(流配)중이었던 1681년(숙종 7) 탄생(誕生)했는데, 공교롭게도 부친이 세상을 떠나기 전해인 1680년(숙종 6) 탄생하였다는 것이니 이는 정약용이 9세에 모친(母親)이 세상을 떠날 때 보다 더 어린 연령(年齡)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불행(不幸)을 겪었다.
그런데 이익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草野)에 묻혀서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전력(專力)을 기울였으며, 성호의 문하(門下)에서 권철신(權哲身)을 비롯해 기라성(綺羅星)같은 학자(學者)들이 배출(輩出)되었다.
이익은 2세라는 어린 연령에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중형(仲兄)인 섬계(剡溪) 이잠(李潛)으로부터 학문(學問)을 배웠는데 이잠이 1706년(숙종 32) 노론(老論) 김춘택(金春澤)과 이이명(李頤命)이 당시 왕세자(王世子)를 위해하려 한다는 상소(上疏)를 올려 일대 파문(波紋)을 일으켜 숙종(肅宗)의 친국(親鞫)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장살(杖殺)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사건(事件)이 발생(發生)하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