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10)[강원경제신문-202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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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1801년(순조 1) 음력 4월 19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순교(殉敎)하였는데, 그 이후 외국 성직자(外國聖職者)들은 공통적으로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전례(前例)를 만들게 되었다.
한편 주문모 신부가 감옥(監獄)에 갇히게 되면서 그에게 마리아라는 세례명(洗禮名)을 받았던 왕족(王族) 송씨부인(宋氏夫人)과 신씨부인(申氏夫人)에게도 그 화가 미치었으니, 주 신부가 순교하기 1개월전인 3월 26일 경희궁(慶熙宮)에서 사약(賜藥)을 마시고 순교하였는데, 이들의 신분이 왕족이었기에 참수형(斬首刑) 대신에 사약의 조치를 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영향으로 강화도(江華島)에 유배(流配)되었던 은언군(恩彦君)도 사사(賜死)되었으며, 주문모 신부의 처소(處所)를 제공했던 강완숙(姜完淑)도 주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이후 음력 5월 23일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궁녀(宮女) 출신 강경복(姜景福),문영인(文榮仁)을 비롯해 9명의 남녀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연령(年齡)은 41세였다.
뒤돌아 보면 강완숙은 휘(諱)는 확인할 수 없으나 참판(參判)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진 진주강문(晋州姜門) 후손(後孫)의 딸로 탄생(誕生)하여 41년의 파란만장한 생애(生涯)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부친(父親)의 벼슬과 관련해 공식적인 사료(史料)에서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1976년 가톨릭출판사에서 출간한 “한국순교사화” 제하의 책에 벼슬이 게재되어 있는 것을 통하여 볼 때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판단된다.
한편 여성(女性)이 남성(男性)의 종속적(從屬的)인 존재(存在)로 인식(認識)되었던 조선 시대(朝鮮時代)에 교회(敎會)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나 강완숙이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에 의하여 그 리더쉽을 인정받아 최초의 여성회장(女性會長)으로 임명(任命)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이와 관련해 강완숙의 지도자(指導者)로서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사건(事件)이 있었으니, 주문모 신부가 1795년(정조 19) 을묘박해(乙卯迫害)로 인하여 체포의 위기에 직면하였을때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을 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주 신부를 그녀의 처소(處所)에 은신시켰다는 점인데 생각할수록 놀라운 결단력(決斷力)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강완숙도 결국 신유 박해(辛酉迫害)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801년(순조 1) 7월 2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남녀 신자 9명과 함께 참수형(斬首刑)으로 순교하게 되니 신앙(信仰)을 수호(守護)하기 위하여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生命)을 희생한 그 고귀한 삶에 숙연한 심정 금할 수 없다.
어느 덧 세월은 흘러 강완숙이 순교한지 213년이 되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敎皇)의 미사 집전으로 거행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순교자”시복식(諡福式)에서 복자품(福者品)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이제 본 칼럼의 연재를 마치면서 조선 후기(朝鮮後期) 여성지도자(女性先覺者)로서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 주었던 강완숙(姜完淑)의 고귀(高貴)한 생애(生涯)가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