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8)[강원경제신문-202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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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耈)의 딸로서 15세에 영조(英祖)의 계비(繼妃)로 간택(揀擇)되었는데, 순조(純祖)에게는 증조모(曾祖母)가 된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정조(正祖)가 승하(昇遐)하고 순조(純祖)가 즉위(卽位)한 이후 정순왕후가 권력을 장악하여 5년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1801년(순조 1)에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에 300명이 순교(殉敎)하고 수백명이 귀양을 가는 참화(慘禍)가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정순왕후가 천주교(天主敎)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던 것인지 그 배경(背景)을 살펴 본다.
정순왕후가 천주교에 대하여 강경한 방침을 취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흑산도(黑山島)로 유배(流配)갔던 친정 오빠 김구주(金龜柱)의 정적(政敵)을 타도하기 위한 명분으로 반대세력이었던 남인계 학자(學者)들을 탄압하게 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남인계 학자들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다보니 천주교 신자들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는 국면이 형성되었던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김구주는 무슨 연유로 흑산도로 유배가게 되었던 것인지 그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신유박해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포인트가 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서 1762년(영조 38)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영조(英祖)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속에 가두어서 결국 세상을 떠난 불행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반대한 홍봉한(洪鳳漢) 일파를 흔히 시파(時派)라 일컫고, 이에 반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지한 김상로(金尙魯),김구주(金龜柱) 일파를 벽파(辟派)라 한다.
그런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견해 차이로 시작된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어떻게 순조 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살펴 본다.
시벽(時僻)의 당쟁(黨爭)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776년(정조 1) 벽파의 수장(首長)이라 할 수 있는 김구주가 정조의 장인(丈人)이면서 시파인 홍봉한 일파를 공격하려다가 오히려 화를 입어 김상로(金尙魯)는 죽음을 당하고 김구주는 흑산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김구주는 9년동안 유배 생활(流配生活)을 하다가 정조로부터 본토 복귀(本土復歸)의 은사(恩赦)를 입어 나주(羅州)로 이배(移配)하여 결국 그곳에서 일생(一生)을 마치게 되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김구주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남인 세력(南人勢力)에 대하여 원한(怨恨)을 품게 되었으며, 그 이후 때를 기다리다가 정조의 승하 이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마침내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시행(施行)이라는 명분하에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켰던 것이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