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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2)[강원경제신문-20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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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내포(內浦)의 사도(使徒)라 불리웠던 이존창(李存昌)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강완숙(姜完淑)은 마침내 천주교(天主敎)에 입교(入敎)하며그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전교활동(傳敎活動)을 시작하여 우선 시어머니와 전처(前妻아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입교시켰다.

 

또한 예산(禮山)에 있는 친정 부모(親庭父母)까지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결국 입교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전교에 대한 강완숙의 그 열정(熱情)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1791(정조 15)에 발생한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인하여 정약용(丁若鏞)의 친척(親戚)이 되는 호남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순교(殉敎)하였으며그러한 영향(影響)으로 충청도 지방(忠淸道지방)까지 파급(波及)되어 많은 신자(信者)들이 투옥(投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후환(後患)이 두려워 아무도 신자들을 돕지 못할 때 강완숙이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위험(危險)을 무릅쓰고 감옥(監獄)에 가서 사식(私食)을 제공(提供)하였다가 결국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 되었으나강완숙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한 모습과 양반집 부녀자(婦女子)라는 점이 참작되어 석방(釋放)되었다.

 

그러나 강완숙의 이러한 적극적(積極的)인 행동(行動)으로 인하여 가정불화(家庭不和)가 일어 났으며결국 남편(男便)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시어머니를 비롯하여 친딸과 전처 아들과 함께 서울로 상경(上京)하게 되었다.

 

이후 강완숙은 1795(정조 19) 조선(朝鮮)에서 최초로 거행된 부활 전야(復活前夜미사에서 그 전해인 1794(정조 18) 12월 조선에 입국(入國)하였던 주문모(周文謨신부(神父)로부터 골롬바라는 세례명(洗禮名)으로 영세(領洗)하였으며주 신부가 그녀의 열정적인 신앙생활(信仰生活)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최초의 여성 회장(女性會長)으로 임명(任命)하였다.

 

그런데 당시 여성(女性)의 권리(權利)가 크게 제약(制弱)을 받았던 조선에서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에게 이런 지도자(指導者)의 직책(職責)을 부여(附與)한 파격적인 조치(措置)가 놀랍게 생각된다.

 

물론 이것은 교회(敎會)라는 특수성(特殊性)이 있기에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한편으론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데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강완숙의 탁월(卓越)한 리더쉽이 있었기에 주문모 신부로부터 인정(認定)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강완숙은 다분히 여장부(女丈夫)의 기질(氣質)이 강하였다고 느껴지는데이미 1회에서도 거론한 바 있지만 강완숙이란 성명(姓名)이 범상치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직자(聖職者)로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하여 강완숙을 여성지도자(女性指導者반열(班列)에 오르게 하였던 주문모 신부는 어떤 인물(人物)이었는지 살펴 본다.

 

주문모 신부는 1752(淸 乾隆 28) 중국(中國양자강(揚子江하류의 소도시인 쑤저우(소주.蘇州)에서 탄생(誕生)하였는데어릴 때에 부모(父母)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成長)하였으며서학(西學)에 흥미(興味)를 느낀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결국 천주교(天主敎)에 입교(入敎)하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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