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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조선왕조 성군(聖君) 세종(世宗) 생애 연구(4)[강원경제신문-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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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집현전(集賢殿)에서 많은 서적(書籍)을 편찬(編纂)하게 됨에 따라서 인쇄술(印刷術)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우리나라는 고려 중기(高麗中期) 금속 활자(金屬活字)를 가지고 서적을 편찬한 일이 있었으나 인쇄술(印刷術)의 수준(水準)이 높지 못하였다.

 

구체적으로 동판 그릇에 황랍을 녹여 부은 다음 금속 활자를 꽂고 황랍이 굳으면 종이를 대고 인쇄하였는데, 활자가 이리저리 밀려 찍는 시간보다 이를 바로잡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나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된 이후 태종(太宗) 대에 이르러 비로소 활자(活字)를 다시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는 고정된 동판(銅版)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황랍을 녹여 부은 다음 불규칙한 다각형의 활자를 꽂아서 황랍이 말라 굳어진 뒤에 인쇄를 시작하였다.

 

이후 세종(世宗)은 즉위(卽位)한 이후 1420년(세종 2)에 공조참판(工曹參判) 이천(李蕆)으로 하여금 이러한 결점(決定)을 개선시켜 우선 활자는 정사각형의 입방체(立方體)로 하고 대소를 동일하게 하였으므로 황랍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하루에 20여매를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세종 말년(末年)에는 더욱 더 연구(硏究)하여 고정된 동판을 없애고 새로 분리된 동선(銅線)을 사용하여 근대 활자(近代活字) 조판술(組版術) 같이 판식(板式)의 대소를 자유자재로 하여 간편하게 인쇄할 수 있었다.

 

한편 세종은 천문(天文)과 역학(易學)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김담(金淡)을 비롯하여 김조(金銚), 이순지(李純之), 이천(李蕆), 정흠지(鄭欽之), 장영실(蔣英實) 등을 가까이 하고 그들을 격려하여 천문 관측기(天文觀測器)를 제작(製作)하고 역법(曆法)을 개정(改定)하였다.

 

이와 관련해 천문 관측기기(天文觀測機器)인 간의(簡儀), 천문 측정기(天文測程器)인 혼천의(渾天儀),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제작하였고 아라비아 역법을 토대로 만들었다는 원나라 곽수경(郭守敬)의 수시력(授時曆)과 명나라 통궤 역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칠정산 내외편(七政算內外篇)이라는 역서(曆書)를 편찬(編纂)하였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천문도(天文圖)를 제작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본래 고구려 시대(高句麗時代)에 있었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로서 돌로 새긴 것이 평양(平壤)에 보관되어 내려 왔으나, 전란(戰亂)으로 없어진 것을 태조(太祖) 대에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어서 다시 돌에 새겼으며 태종에 이어서 세종 대에도 국왕(國王)의 중대한 일로 계승(繼承)되었던 것이니 당시 천문도는 상징적(象徵的)인 의미(意味)가 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高麗)에도 만월대(滿月臺) 서남쪽 언덕 위에 관측대(觀測臺)가 있었으며, 고려사(高麗史)에 남아 있는 오행지(五行志)를 비롯하여 천문지(天文志), 역지(歷志) 등을 통하여 고려(高麗) 때의 관원(官員)들이 철저하게 자연 현상(自然現象) 전반(全般)을 관찰(觀察), 기록(記錄)하였으며, 기상 관측(氣象觀測)에 얼마나 과학적(科學的)으로 치밀하게 관찰하였는지 여부를 짐작할 수 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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