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왕조 성군(聖君) 세종(世宗) 생애 연구(1)[강원경제신문-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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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한글창제하면 떠오르는 임금이 세종(世宗)이라 할 수 있는데, 32년의 재위 기간(在位期間) 동안 어떤 생애(生涯)를 살았기에 성군(聖君)으로 알려지게 된 것인지 구체적인 발자취를 살펴 본다.
세종은 태조(太祖)가 1392년(태조 1) 7월 17일 개성(開城)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창업(創業)한 지 5년 후가 되는 1397년 (태조 6) 5월 15일에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준수방(俊秀坊)에서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사이에 3남으로 탄생(誕生)했다.
이와 관련해 세종이 탄생한 준수방은 경복궁(景福宮)의 서문(西門) 영추문(迎秋門) 건너편 의통방(義通坊)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 일대로 추정되는데, 구체적으로 청운동(靑雲洞)을 흘러내리는 한 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玉仁洞)으로 내려오는 인왕산(仁王山) 골짜기의 깨끗한 물줄기가 합치는 조그마한 삼각 지대가 준수방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탄생한 이후 문신(文臣) 윤저(尹抵)의 집에 보내져서 부인(夫人) 동복오씨(同福吳氏)가 키웠으며, 1408년(태종 8) 2월 12세 때, 충녕군(忠寧君)에 봉(封)해졌으며, 그 해 같은 달에 경기도(京畿道) 양주(楊州) 출신의 문신 심온(沈溫)의 딸과 길례(吉禮)를 올렸다.
이후 16세가 되는 1412년 (태종 12) 경복궁 서쪽에 경회루(慶會樓)가 완성됐으며, 그 해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진봉(進封)됐으니, 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을 하고 일정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을 의미했다.
한편 충녕대군 시절 세종을 키워준 유모 오씨(乳母吳氏)는 1444년 (세종 26) 세상(世上)을 떠났는데, 세종은 왕위(王位)에 오른 이후 오씨를 극진히 대우했으며 세상을 떠난 이후 종이 150권을 비롯해 정포 50필, 흰 모시 10필, 쌀과 콩 70석을 하사(下賜)해 어린 시절 키워준 점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어서 왕위를 계승할 인물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으나,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사냥, 풍류 생활(風流生活)을 즐겼는데 이러한 양녕대군의 행동에 대하여 종사(宗社)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부왕(父王)인 태종을 비롯하여 신하(臣下)들의 근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이러한 상황에서 양녕대군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훈계(訓戒)했으나, 특별히 개선(改善)되는 점이 없어서 결국 신하들의 주청(奏請)을 수용해 양녕대군을 왕세자(王世子)에서 폐위(廢位)하고 그 대안(代案)으로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冊封)되었으니, 이는 1418년 6월의 일이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