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23)[강원경제신문-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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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으로 인해 장기(長鬐)에서 다시 강진(康津)으로 유배(流配)가게 된 정약용(丁若鏞)은 강진읍 동문 밖에 있는 주막에서 거처하게 되는데 사암(俟菴)은 그 곳을 사의재(四宜齋)라 했다.
이러한 사의재에 1802(순조 2)년 초봄에 아전(衙前)의 자녀들을 정약용이 직접 가르치면서 제자(弟子)가 되는데 그 인원(人員)이 6명이었다.
그중에서 황상(黃裳)을 비롯하여 황취(黃聚)와 이청(李晴) 등은 정약용에게 글을 배우면서 훗날 학자(學者)와 문인(文人)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정약용에게 그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던 시절(時節)에 아전의 자식들이 사암에게 가르침을 청하였으니, 재주 있고 발랄한 젊은이들과 대화(對話)를 나누는 일은 사암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심신(心身)의 안정(安定)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1801년(순조 1) 11월부터 사의재에 거주한 이후 1805년(순조 5) 겨울에는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기거했으며, 1806년(순조 6) 가을에는 제자 이청의 집으로 이주하여 우거(寓居)했으며, 마침내 1808년(순조 8) 봄에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뒷산에 있는 다산 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居處)를 옮겼다.
이와 관련해 다산초당은 강진읍에서 30리쯤 떨어진 귤동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한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었는데 그의 아들 윤규로(尹奎魯)가 부친(父親)과 함께 뜻을 모아 정약용에게 거처를 제공했던 것이다.
정약용이 강진읍에서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대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 폭포(瀑布)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庵子)를 짓고, 서적(書籍) 천여권을 쌓아 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고 석벽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겼다.
덧붙이면 서적 천여권이란 본래 다산 초당에 소장(所藏)돼 있었던 것인데, 사암이 이 곳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서적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한편, 그해 겨울에 주역심전(周易心箋)이 완성(完成)됐는데 이 저서(著書)와 관련한 내력(來歷)을 소개하면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온 이후 사의재에서 주역(周易)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이듬해 여름에 차록(箚錄)해 놓은 공부가 있어 겨울이 되어 완성하였는데 모두 8권이었다.
이것이 갑자본(甲子本)이었는데 소략(疏略)하고 완전치 않은 부분이 있어 없애 버렸으며, 이듬해에 개정(改訂)하여 찬수(纂修)했는데 이 또한 8권이며, 이것이 을축본(乙丑本)이었다.
1805년(순조 5) 겨울에 장남(長男) 정학연(丁學淵)이 와서 보은산방(寶恩山房)에 함께 기거(起居)하면서 을축본을 전부 개정하여 16권이 새롭게 완성됐으니 이것이 바로 병인본(丙寅本)이었다.
그런데 병인본도 누락(漏落)된 부분이 있어서 다시 개정해 마재로 다시 귀향(歸鄕)한 장남을 대신해 이청(李晴)으로 하여금 24권으로 완성하게 하니 이것이 정묘본(丁卯本)이었다.
그러나 정묘본 역시 정밀(精密)하지 못하고 잘못된 내용이 있어서 무진년(戊辰年) 가을 차남(次男) 정학유(丁學遊)로 하여금 24권으로 최종적으로 탈고(脫稿)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무진본(戊辰本)이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