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15)[강원경제신문-20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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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이 정조(正祖)의 명(命)으로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에 부임(赴任)한 이후 알게 된 백성이 이계심(李啓心)이었다.
전임(前任) 도호부사 시절(時節)에 포수보 면포 한필 대금으로 돈 900푼씩을 거두어 들였는데, 이계심이 백성 1천명을 인솔(引率)하고 관청(官廳)에 들어가 항의하자 부사(府使)가 벌을 주려하니 1천명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계심을 둘러싸고 계단으로 올라가며 소리를 지르니 천지(天地)가 동요(動搖)했다.
구체적으로 아전(衙前)과 관노(官奴)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자 이계심은 달아 났으며 오영(五營)에서 기찰(譏察)하여 체포(逮捕)를 시도(試圖)하였으나 실패(失敗)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약용이 부임한 것을 알게 된 이계심은 백성들의 건의 사항(建議事項) 10여 조목(條目)을 기록(記錄)하여 올리고 결국 자수(自首)하였다.
정약용은 주위에서 이계심을 체포하기를 권유(勸誘)하였으나 석방(釋放)하면서 말하기를 “관장(官長)이 밝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백성이 제 몸만 위하느라 교활해져서 고치기 어려운 폐단을 보고도 관장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목민관(牧民官)으로서 백성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약용의 진면목(眞面目)을 엿볼 수 있었다.
곡산 향교(谷山鄕校)에 “오례의(五禮儀)”가 있었는데 그 책에는 포목을 재는 자의 그림이 실려 있었는데 그림의 자와 그때 사용하는 자를 비교하니 차이가 2촌이나 있었다.
그래서 그림의 자에 맞도록 자를 새로 제작하여 서울 군영(軍營)에서 사용하는 구리자(銅尺)와 일치시켜 면포를 거두었더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그 이듬해에는 포목이 더욱 귀해져서 칙수전(勅需錢)과 관봉전(官俸錢) 2천냥을 풀어 평안도(平安道)에 가서 포목을 사다가 서울에 바칠 것을 충당하고 그 가격을 백성들에게서 징수해 채웠는데 한 집에 200푼이 넘지 않아서 백성들은 호마다 송아지를 한 마리를 얻은 셈이었다.
정약용은 환곡(還穀)의 이용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곡식을 꾸어줄 때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나누어 주고, 거둘 때는 한꺼번에 운반(運搬)하도록 했다.
그래서 환곡 정리도 빠르고 깨끗이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이 고르게 환곡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접 돌아다니며 나누어 주었으며, 백성들끼리 다투는 송사(訟事)가 벌어졌을 때는 공정하게 처리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