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4)[강원경제신문-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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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1762년(영조 38) 마재에서 탄생(誕生)한 정약용(丁若鏞)은 불과 4세라는 어린 연령(年齡)에 부친(父親)으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6세에 연천 현감(涎川縣監)으로 부임(赴任)하는 정재원(丁載遠)을 따라서 관사(官舍)에서 생활(生活)하였는데, 7세에 ‘산(山)’이라는 제하(題下)의 제목(題目)으로 직접 시(詩)를 지을 정도였으니 이는 타고난 천재성(天才性)이 아니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여기서 정약용이 불과 7세라는 어린 연령에 직접 지은 시 ‘산(山)’의 전문(全文)을 소개(紹介)한다.
‘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 거리가 멀고 가까워서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를 보고 정재원(丁載遠)이 “분수(分數)와 소장(消長)에 밝으니 성장(成長)하면 틀림없이 역법(曆法)이나 산수(算數)에 능통할 것” 이라 했다고 전하는데, 특히 정약용이 훗날 주역(周易)에 조예(造詣)가 깊었던 사실(事實)로 미루어 볼 때, 가히 정재원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과연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정약용은 7세에 홍역(紅疫)을 앓았는데 이러한 전염병(傳染病)으로 인하여 사암(俟菴)도 그 후유증으로 눈썹 한가운데가 나누어지는 흉터가 생겼으며, 눈썹이 세 개인 사람이란 뜻의 삼미자(三眉子)의 유래(由來)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그의 재치있는 식견(識見)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정약용은 6남 3녀의 자녀중에서 대부분이 홍역(紅疫)을 앓다가 세상(世上)을 떠나는 불행(不幸)을 겪기도 하였는데, 1797년(정조 21)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재임(在任)중에 의학 전문서(醫學專門書)인 마과회통(麻科會通) 12권을 저술(著述)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어려서 자신의 홍역을 치료하여 주었던 몽수(蒙叟) 이헌길(李獻吉)과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마과회통은 당시 홍역에 관한 국내외 책들중에서 새로운 이론(理論)과 치료법(治療法)을 밝혀 놓은 것인데 특히 마과회통 보유(補遺) 2에 두창(痘瘡)의 치료 방법(治療方法)을 자세히 소개(紹介)한 종두심법요지(種痘心法要旨)가 게재되어 있는 점을 주목한다.
그런데 어린 시절(時節)부터 천부적(天賦的)인 재능(才能)을 발휘하고 있던 정약용에게 첫 시련(試鍊)이 다가 왔으니, 모친(母親) 해남윤씨(海南尹氏)가 1770년(영조 46) 향년(享年) 43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모친이 세상을 떠날 당시 정약용의 연령(年齡)이 9세에 불과하였는데 한마디로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에 이러한 불행을 겪었던 것이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