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3)[강원경제신문-202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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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의 형제(兄弟)를 소개(紹介)하면 장남(長男)으로서 의령남씨(宜寧南氏) 소생(所生)으로 이복형(異腹兄)이 되는 부연(鬴淵) 정약현(丁若鉉)이 있는데, 이복동생(異腹同生)들이 천주교(天主敎)와 관련해 참화(慘禍)를 당했으나, 그는 천주교를 믿지 않고 끝까지 가문(家門)을 지켰다는 점에서 범상(凡常)치 않은 인물(人物)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차남(次男)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수제자(首弟子)인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했으며, 동복동생(同腹同生) 정약용과 우애(友愛)가 두터웠다.
덧붙이면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흑산도(黑山島)에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였으며, 결국 해배(解配)되지 못하고 1816년(순조 16) 향년(享年) 59세를 일기(一期)로 세상(世上)을 떠났으며 ‘자산어보(滋山魚譜)’와 ‘송정사의(松政私議)’를 저술(著述)하였다.
특히 자산어보는 당시 흑산도(黑山島) 근해(近海)에 있는 수산물(水産物)을 어류(魚類), 패류(貝類), 조류(藻類), 해금(海禽),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分類)해 조사(調査)한 내용(內容)을 기록(記錄)한 것으로서 실학자(實學者)로서의 손암의 진면목(眞面目)을 유감없이 발휘한 탁월한 저서(著書)라 할 수 있다.
삼남(三男) 선암(選庵) 정약종(丁若鍾)은 본래 주자학(朱子學)과 도가사상(道歌思想)에 심취(心醉)했으나, 중형(仲兄)인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 교리(天主敎敎理)를 배운 이후 입교(入敎)해 아우구스띠노라는 세례명(洗禮名)으로 영세(領洗)했으며, 독실(篤實)한 천주교 신자(信者)로서 명도회(明道會) 초대 회장(初代會長)으로 활동(活動)하였다.
선암은 또한 한국 천주교회(韓國天主敎會) 최초(最初)의 신학자(神學者)로서 ‘주교요지(主敎要旨)’ 르 저술하였는데, 이는 당시 최초의 평신도 예비자(平信徒豫備者) 교리서(敎理書)라 할 수 있었으니, 선암의 신학적 지식(神學的知識)이 어느 정도로 탁월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교회(敎會)의 지도자(指導者)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선암은 1801년(순조 1) 발생한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형제(兄弟)중에서 유일하게 서소문밖 네거리 사형장(死刑場)에서 향년(享年) 42세를 일기(一期)로 장렬한 순교(殉敎)를 했다.
또한 정약용의 누이는 1784년(정조 8) 베이징(북경.北京) 북당 천주교회(北堂天主敎會)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神父)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洗禮名)으로 영세(領洗)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領洗者)가 된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의 부인(夫人)이었으니 사암(俟菴)과 만천(蔓川)이 처남(妻男)과 매부(妹夫) 관계(關係)였다는 점도 예사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러한 형제들 이외에 정재원(丁載遠)의 부실(副室) 잠성김씨(岑城金氏) 소생의 정약횡(丁若鐄)과 3인의 누이가 있었으니, 이를 정리하면 정약용은 5남 4녀중에 4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