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왕조 성군(聖君) 세종(世宗) 생애 연구(3)[강원경제신문-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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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집현전(集賢殿)은 국정 전반에 걸친 여러가지 문제를 왕명(王命)에 따라 다루었는데, 구체적으로 세종(世宗)은 집현전의 학사(學士)들에게 직접 명령을 하였고 문물 제도(文物制度) 정비(整備)를 시급한 과제(課題)로 삼고, 문제되는 점의 해결 방안(解決方案)을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연구 과제(硏究課題)가 문적(文籍)으로 정리 편찬되어 나타난 것이 훗날 세종 시대(世宗時代)의 문화(文化)를 알려 주게 되었는데, 그것은 국정(國政)에 중요한 문헌(文獻)이었으며 당시 국가를 다스리는 정신을 유교(儒敎)에 두고 있던 것을 명확히 알려 주는 것이었다.
한편 집현전의 규모(規模)와 시설(施設)을 살펴 보면 당시에 있어서는 잘 준비되고 시설을 갖추었던 연구 기관(硏究機關)이었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라 일을 바로잡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공헌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그런데 본래는 좁은 전각(殿閣)을 사용하였으나 나라 안에서 모으거나 개성(開城)에서 수집된 책과 밖에서 사들인 책이 쌓이게 되자 필요한 대로 쉽게 찾아보기에 힘이 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종도 국정(國定)을 수행(隨行)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령할 일도 많고 학사들도 연구하는데 있어서 불편(不便)을 많이 느끼게 되어 마침내 1429년(세종 11) 경복궁(景福宮) 서쪽에 집현전의 규모를 확장(擴張)하여 새로 설치(設置)하였다.
집현전의 학사들은 아침 일찍이 들어와서 저녁 늦게 나갔는데 때를 맞추어 부지런히 연구하였으며, 늘 임금의 옆에서 공부하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일과(日課)이었다.
학사들은 밤에도 번(番)을 들어 집현전을 지키고 밤을 새워 글을 읽었는데 때로는 새벽 첫닭 소리를 듣고야 자리에 눕기도 하였으니 얼마나 학문(學問)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엿볼 수 있다.
세종은 학사들이 다른 데 마음을 쓰지 않고 임금이 부탁한 일에만 전력할 수 있도록 모든 비용은 나라에서 지원하였는데, 경사(經史)를 중심한 사상(사상)과 역사(歷史)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문물 제도,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등 임금의 정치(政治)에 직접 필요한 과학(科學)을 학사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여 주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집현전은 각 분야에 훌륭한 학자(學者)들을 배출(輩出)하였는데,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하여 최항(崔恒), 남수문(南秀文), 권채(權採), 신석조(辛碩祖), 박팽년(朴彭年), 어효첨(魚孝瞻),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류성원(柳誠源), 정인지(鄭麟趾), 양성지(梁誠之), 신숙주(申淑舟) 등등, 당대의 학자(學者), 문장가(文章家)들로서 명성(名聲)을 떨쳤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