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온공주의 사당과 '관월당'의 연관성 고찰[문암 역사작가의 보금자리-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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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순조의 차녀 복온공주의 사당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관월당(觀月堂)'을 조사하면서 시작되었다.
관월당은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왕실의 사당으로 추정되는 건축물로서 일본에서 100년만에 귀환한 문화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포인트는 관월당에 신주가 봉안되었던 인물이 누구인가? 여부에 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주목한 인물이 본 칼럼에 소개하는 복온공주이다.
복온공주는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탄생한 1남 3녀중에서 차녀로서 1818년에 탄생하여 1832년 불과 15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불행한 왕족이다.
복온공주는 1830년 안동김문으로서 문곡 김수항의 후손인 창녕위 김병주와 혼인하였다.
순조는 송현동의 심상규의 저택을 복온공주에게 하사하면서 이 곳에서 신혼생활을 하게 되나 통탄스럽게도 불과 2년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필자는 복온공주가 별세하신 이후 이 곳에 사당을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사당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었으나 간접적인 기록이 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었다.
덧붙이면 이러한 자료를 직접 본 것은 아니고 관련 논문을 통하여 이 자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점을 밝혀 둔다.
이 자료의 서명은 ' 갑오 재동 제물정례책(甲午齋洞祭物定例冊) ' 이라는 것인데 순조가 복온공주가 별세한 이후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음식 리스트를 저술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이 간행된 해가 1834년이니 복온공주가 떠난 이후 2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 서명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으니 ' 재동(齋洞) ' 이라는 대목이다.
이는 현재의 종로구 재동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복온공주가 거주한 지역은 재동이 아니라 송현동(松峴洞)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재동이라 했을까? 하는 점이다.
일단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송현동과 재동이 독립적인 지역이나 거리상으로 먼 거리는 아니었기에 송현동을 재동에 포함시커서
재동이라 했을까? 여부인데 확신하기에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제 지인과 통화를 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다.
1834년 당시 재동에는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와 정조의 후궁이면서 문효세자의 모친이신 의빈성씨의 사당이 있었다.
덧붙이면 문효세자는 1782년에 탄생하여 1786년 불과 5세라는 어린 연령에 훙서하였으며, 의빈성씨는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불과 4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실로 왕실의 연속적인 붎행이었다.
아직은 하나의 가설이기는 하나 복온공주의 사당을 송현동에 건립하지 않고 백부(伯父)와 조모뻘이 되는 사당안이나 그 근처에 건립하였을 가능성이다.
일단 사당안은 '문희묘(文禧廟)' 관련 논문에 복온공주와 관련된 내용이 없으므로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복온공주의 사당을 문희묘 근처에 건립하였다면 '재동'이라고 서명에 쓴 의미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송현동 부지는 식산은행이 소유권을 넘겨 받은 이후 1924년 그 부지에 있었던 복온공주의 사당을 스기노 기세이에게 기증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덧붙이면 식산은행이 재동의 어느 부지를 소유했다는 기록이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기에 앞으로 이 대목이 명쾌히 풀려야만 재동의 복온공주 사당과 관월당과의 연관성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26년 4월 15일(수) 문 암 올 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