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20)[강원경제신문-202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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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의 강력한 후원자(後援者)라 할 수 있었던 정조(正祖)의 갑작스런 승하(昇遐)는 사암(俟菴)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는데, 정조는 무슨 이유로 승하하게 된 것인지 그 경위(經緯)를 소개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1800년(정조 24) 5월 30일 정조는 경연(經筵)에서 중요한 하교(下敎)를 내렸는데 오회연교(五晦筵敎)라고 불리는 이 경연에서 정조는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사실로 인정해라. 그렇게 한다면 내 아버지 사도세자를 궁지에 몰아 넣은 세력을 처벌하지는 않겠다. 그러니까 경들이(노론벽파) 먼저 잘못을 시인하고 고개 숙인다면 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겠다.”
이는 노론 벽파(老論辟派)의 항복(降伏)을 받아내겠다는 정조의 강력한 의지(意志)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의 정국(政局)은 정조가 친위 세력(親衛勢力)을 중심으로 왕권(政權)을 강화(强化)하느냐 아니면 노론이 주도권(主導權)을 잡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갈림길)의 기로(岐路)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6월 13일 정조의 등에 난 종기(腫氣)가 악화해 의관(醫官)들이 처방(處方)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回復)하지 못했으며, 결국 보름이 지난 6월 28일 조선(朝鮮)의 르네상스를 실현(實現)하고자 했던 정조가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긴 채 승하하고 말았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는데, 정조가 의관(醫官)들의 진료(診療)에도 병세(病勢)가 악화(惡化)되자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직접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올리라고 지시했다는 것인데 정순왕후는 영조(英祖)가 건강이 안 좋았을 때 이 약재(藥材)를 복용(服用)한 이후 효험(效驗)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經驗)에 비추어서 성향정기산을 권유(勸誘)했다.
그러나 이 약재로도 특별한 효험이 없자 이번에는 정순왕후가 직접 성향정기산을 들고 정조의 처소인 영춘헌(迎春軒)에 들어갔으며, 그 이후 정조가 승하(昇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당시의 상황이 정조실록(正祖實錄)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 해당 내용(內容)을 인용(引用)한다.
“ 이날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에 상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 이다’하였는데 얼마 안 돼 대상이 났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