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감

[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3)[강원경제신문-2025-09-10]

컨텐츠 정보

본문

▲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주문모(周文謨신부(神父)가 천주교(天主敎)에 입교(入敎)한 이후 베이징(북경.北京)으로 이주하여 학문(學問)에 정진하던 중뜻한 바 있어서 북경 천주교 신학교(北京天主敎神學校)에 입학하여 1회로 졸업한 이후 사제(司祭)로 수품되었으니 이러한 사실만 봐도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덧붙이면 주문모 신부는 평소 인품(人品)이 어질고 총명하였으며학문에 대한 시야(視野)가 넓었다고 하는데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조선(朝鮮)으로 입국(入國)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소개한다.

 

당시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신자들은 베이징(북경.北京교구(敎區)에 인편(人便)을 통하여 성직자 파견(聖職者派遣)을 간청하였는데이에 대하여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湯士選주교(主敎)가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으며마침내 1791(정조 15) 2월 마카오 태생 중국인 오(요안 레미디오스(Johannedos Remedios, Wou) 신부에게 조선 전도(朝鮮傳道)의 임무를 위임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 신부가 이러한 임무를 띠고 베이징을 출발하여 조선을 향하여 20여일에 걸친 여정 끝에 국경(國境)에 도착하였으나 신자들이 마중 나오지 못하여 조선 입국(朝鮮入國)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조상 제사(祖上祭祀)를 금지한 구베아 주교의 서한(書翰)으로 인하여 조선천주교회 안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박해(迫害)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소 조선천주교회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구베아 주교는 성직자의 영입을 간절히 원하는 신자들의 입장을 비오 6세 교황(敎皇)에게 서한을 통하여 보고하였다.

 

그 결과 비오 6세 교황은 이러한 조선천주교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으나당시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인하여 교회는 대외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된 이후 신자들이 다시 성직자 영입을 간청하게 되었으며이를 구베아 주교가 수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직자 영입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1794(정조 18) 2월 구베아 주교로부터 베이징에서 선종(善終)한 오 신부에 이어서 조선 전도의 위임을 받은 주문모 신부가 베이징을 출발하여 20여일만에 봉황성(鳳凰城책문(柵門)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미리 약속한 신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아직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으며더군다나 압록강의 얼음도 녹기 시작하여 국경으로 잡입(潛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직자 영입은 잠시 보류하고 주문모 신부는 10개월동안 만주(滿洲지방에 있는 교회를 두루 방문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10개월이 지나고 1794(정조 18) 12월 주문모 신부가 만저우(만주.滿洲)에서 신자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그 이후 어둠을 타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 관문(義州關門)을 무사히 통과한 이후 마침내 1795(정조 19) 정월초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와 관련해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할 당시 전국적으로 신자수가 4천명에 이르렀다는 것인데그는 계동(桂洞)에 있는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처소(處所)를 정한 이후 몇 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우고 성토요일(聖土曜日)에 신자들에게 세례(洗禮)를 주었으며언어 소통(言語疏通)이 안되는 관계로 신자가 사제(司祭)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告解聖事)는 필담(筆談)으로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795(정조 19) 4 5일 부활대축일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 최초로 미사성제를 거행하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7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
이름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