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18)[강원경제신문-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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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조(正祖)가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재임하고 있던 정약용(丁若鏞)을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제수(除授)했는데, 사암(俟菴)은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글 잘하는 선비가 뜻밖에 형사 재판까지 잘 알고 있으므로 곧 너를 불렀다”는 제하의 글을 통해 정조가 곡산도호부사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사암을 형조참의로 제수한 이유를 밝혔다.
정조는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상진(趙尙鎭)에게 말하기를“경(卿)은 이제 늙었소. 참의가 나이가 젊고 총명하니 경은 마땅히 높은 베개를 베고 쉬면서 모든 업무(業務)를 참의에게 넘기시오”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상 전권(全權)을 사암에게 넘기라는 정조의 유시(諭示)였다.
이러한 유시를 받은 조상진은 모든 사건(事件)을 사암에게 일임했으니, 실질적으로 형조판서는 조상진이 아닌 정약용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훗날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著述)할 정도로 형사 재판(刑事裁判)에 탁월한 재능(才能)을 보였던 정약용은 억울한 사건부터 철저히 수사(搜査)했으니 명쾌한 재판으로 사건을 해결했다.
구체적으로 사형수(死刑囚) 함봉련(咸奉連) 사건이 있었는데 살인 사건(殺人事件)의 범인(犯人)으로 7년 동안 감옥(監獄)에 있었다.
그런데 사형은 하지(夏至)와 동지(冬至) 사이 만물(萬物)이 생장(生長)하는 때가 지나면 바로 집행(執行)했기 때문에 7년씩이나 살아 있는 것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사건(事件)의 진상(眞相)이 명확히 규명(糾明)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조가 사형집행(死刑執行)을 미룬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이 사건을 정약용에게 맡기면서“의심스런 옥사이니 자세히 살펴서 논계하라”고 유시(諭示)했다.
정약용이 초검(初檢)과 재검(再檢)을 검토한 결과 함봉련이 죄를 뒤집어 쓴 것으로 결론내리고 함봉련을 석방해야 한다고 계청(啓請)했으며, 정조는 이에 따라 즉시 석방하고 의관(衣冠)을 지급하라고 명했다.
정조는 정약용을 깊이 신임하면서 앞으로 중책(重責)을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럴수록 반대파(反對派)들의 반발(反撥)도 더욱 거세지고 있었는데 대사간(大司諫) 신헌조(申獻朝)가 계(啓)를 올려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 등을 추국(推鞫)하여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보고(報告)를 받은 정조는 그럴 리가 없다며 화를 내었으며, 정약용은 조보(朝報)에 그런 내용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는데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민명혁(閔命爀)이 약용이 혐의를 무릅쓰고 벼슬살이하고 있다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며, 그날이 6월 21일이었는데 이튿날에 사암(俟菴)은 관직(官職)을 영원히 떠나겠다는 사직상소(辭職上疏)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