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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 생애 고찰(11)[강원경제신문-202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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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정약용(丁若鏞)이 금정촬방(金井(察訪)으로 좌천(左遷)하는 계기가 됐던 을묘박해(乙卯迫害)의 전모(全貌)를 소개(紹介)한다.

 

1794(정조 18) 청나라 출신의 주문모(周文謨신부(神父)가 조선(朝鮮)의 천주교 신자(天主敎信者)들과 함께 어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 관문(義州關門)을 통과(通過)한 이후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걷기를 12일 동안 반복(反復)하다가 그 이듬해인 1795(정조 19) 정월초(正月初)에 서울에 도착(到着)했다.

 

이와 관련해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할 당시 천주교회(天主敎會교세(敎勢)는 전국적(全國的)으로 신자수(信者數) 4천명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주문모 신부는 계동(桂洞)에 있는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처소(處所)를 정한 이후 몇 개월 동안 조선어(朝鮮語)를 배우고 성토요일에는 신자들에게 영세(領洗)를 주는 한편 고해성사(告解聖事)는 언어(言語)가 소통(疏通)이 안되는 관계로 필담(筆談)으로 했다.

 

그 해 4 5일 부활대축일(復活大祝日)에 주문모 신부의 집전(執典)으로 조선에서 최초(最初)로 미사 성제가 거행(擧行)되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入國)해 사목 활동(司牧活動)을 수행(遂行)한지 6개월이 돼 신변(身邊)에 위협(威脅)을 받게 되는 사건(事件)이 발생(發生)했는데어느 신자의 밀고(密告)로 인해 그동안 극비 정보(極秘情報)였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事實)과 그 처소가 조정(朝廷)에 알려지게 되고 체포령(逮捕令)이 내려지면서 을묘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조정의 체포령에도 불구하고 여러 신자들의 불굴(不屈)의 희생 정신(犧牲精神)으로 결국 체포되지 않고 여성 회장(女性會長)으로 활동(活動)하고 있던 강완숙(姜完淑)의 처소에 은신(隱身)하는데 성공(成功)했다.

 

여기서 주문모 신부가 당국(當局)에 체포되지 않고 강완숙의 처소에 은신하는 과정에서 주문모 신부의 처소를 제공하였던 최인길과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는데 있어서 핵심적(核心的)인 역할(役割)을 수행하였던 윤유일(尹有一)과 지황(池璜)이 체포된 이후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받았으나여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주문모 신부의 행방(行方)을 말하지 않았으며결국 장살(杖殺)의 처분(處分)을 받고 장렬히 순교(殉敎)하였다..

 

한편 조정(朝廷)은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지 못한데 대한 책임(責任)을 물어 이승훈(李承薰)은 예산(禮山)으로 유배(流配)를 갔으며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은 각각 충주 목사(忠州 牧使)와 금정 촬방으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을묘박해의 전모를 소개했는데 대규모 박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남인계(南人系)의 대표적(代表的)인 학자(學者)들이 유배를 가거나 좌천되면서 정국(政局)에 미치는 파장(波長)이 컸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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