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2일 다해 성주간 화요일
컨텐츠 정보
- 11,736 조회
- 0 추천
- 목록
본문
나는 살아있는가? 산 사람은 살리고 죽은 사람은 죽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해하는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인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는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후입니다.
계명은 누군가의 뜻이고 그 뜻을 따라주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영광을 올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으로 당신에게 영광을 올리면 당신도 미래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
사랑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면 하느님은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유다도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한다고 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의사는 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일까요?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또 열심히만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의사 이국종 선생의 아버지는 6·25 때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유공자입니다. 그런데 국가유공자의 자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아 국가유공자 의료 복지 카드를 내밀며 병원을 전전했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고 다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다오직 ‘이학산’이라는 외과 의사만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너에게 받을 의료비는 없단다”라며 이국종 어린이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이국종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꿈을 품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라는 삶의 원칙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국종 선생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아덴만 작전으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겠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총상이 심해, 마치 떨어지는 칼날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이국종 선생은 자원하여 그를 살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상태가 심해 그곳에서는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이미 딱딱해지고 팔다리 네 개 중 세 개도 겨우 붙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지혈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국종 선생은 환자를 급하게 이송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환자를 수송할 수 있는 비행기를 빌리는데 4억 4,000만 원이었습니다. 외교부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국가는 여러 절차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이국종 선생은 이송비 4억 4천은 내가 낼 테니 일단 이송하라”라는 말을 하고 이국종이라는 이름으로 비행기를 빌려 한국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석해균 선장은 6개월 만에 두 발로 걸어서 퇴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명세를 치른 이국종 선생 덕분으로 아주대 병원은 유명해졌지만, 진짜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이국종 교수팀이 긴박하게 데려와 살리는 환자가 많아질수록 병원은 적자가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돈으로는 한 사람을 살리는 데 무리가 있었고 그 이후 추가 비용은 병원이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의사들도 자신들이 벌어 좋은 기계를 사야 할 돈들이 다 중증외상센터 적자 메우는 데로 들어간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중증외상센터로 오시는 분들은 다 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경제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국종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수술환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병원은 더 큰 부담을 떠안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잠도 자지 못하며 일하는데 윗사람과 동료 교수들에게 종일 욕을 먹으며 견뎌야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의료시스템의 문제를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국종은 결국 권역외상센터 지원 예산 201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변한 게 없었습니다. 7년 동안 고장 난 무전기를 바꿔 달라는 말만 수백 번을 했다며 분노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일개 의사가 세상을 바꾸기에 역부족이라고 여긴 이국종 교수는 결국 아주대병원에 사퇴 의사를 밝히게 됩니다.
“한국에서 다시는 이거 안 할 거예요. 이번 생은 망했습니다. 두 번 다신 외상센터에서 근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출처: ‘이국종 교수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결국 사퇴하고 떠난 소중한 인재’, 유튜브 채널, 그시절 그배우]
물론 동료 의사들이나 나라 관리들도 살자고 그런 결정들을 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 뜻을 위해 지나치게 에너지를 다 빼버려 소진된 이국종 교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의사지만 결국엔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시스템 속에 갇힌 현실에서 어떻게 두 부류로 갈리는지는 볼 수 있습니다.
병원과 나라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나와 전혀 상관없고 이익도 안 되는 가난한 이들을 살릴 것인가. 병원을 살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환자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원을 살린다는 것 안에는 ‘내가 살겠다’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병원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만 내가 살겠다는 마음이 조금만 들어있어도 누군가는 죽게 되는 데 협조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이들도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습니다. 가리옷 유다도 그 말에 동의하여 자신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을 넘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안에 ‘그래야 나도 살지!’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나를 죽이려는 뜻이 아니면 실천될 수 없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살려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위가 다 하느님의 뜻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이웃이 죽는지, 혹은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는 일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이 두 부분에 속하게 됩니다.
내가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알아보는 법은 간단합니다. 나의 모든 행위는 누군가는 살리고 동시에 누군가는 죽입니다. 오직 산 사람만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생명이 필요하여 타인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빛으로 갈 것인지, 어둠으로 갈 것인지는 명확합니다. 빛으로 가는 길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