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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3일 다해 사순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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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서 휘둘리는 걸까?> 


    오늘 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부터 구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볼 것 없이 돌로 쳐 죽이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적으로 여기는 이들은 예수님께 이 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언가 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상황을 종료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실 때 항상 ‘은총과 진리’를 이용하십니다. 은총은 피요, 진리는 말씀입니다. 벳자타 연못의 병자를 고쳐주실 때도 은총의 힘으로 치유해 주시고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으로 새로 나게 하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시는 행동은 분명 은총을 주시는 행동입니다. 은총의 힘으로 무언가가 땅에 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른 복음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누군가의 마음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려면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언가 쓰시는 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기 위한 사전작업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심장이 칼에 꿰찔림으로써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이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행동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들 행동에 대해 책임이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각자의 책임은 각자가 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책임을 나누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자신들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요한 8,9) 


    손예진, 김갑수 주연의 영화 '공범'의 줄거리입니다. 


다은과 순만은 매우 각별한 부녀지간입니다. 순만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엄마는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순만은 다은을 키우기 위해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하며 딸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이제 다은은 기자 지망생으로 취직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도중 영화를 하나 보게 됩니다. 15년 전, 유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는 실제 범인의 음성을 마지막 장면에 추가하여 관객들에게 범인 잡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음성 속 목소리가 매우 익숙한 목소리임을 눈치 챈 다은은 그리고 이어진 범인의 말이 자신의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자기에게 습관처럼 했던 말임을 기억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다은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음성을 듣고, 듣고 또 듣고.. .수 차례 의심을 반복하다가 남자친구를 통해 아버지의 신원조사를 부탁합니다. 그러다 자신의 아버지가 전과 3범이며 돌아가신 줄 알았던 어머니는 요양 병원에 의식을 잃은 채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5년 전 유괴사건은 공소시효가 얼마 안 남았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로 이슈를 만든거고,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지며 경찰은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범인을 잡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다은의 신원조사 요구로 순만의 인적사항과 과거 행적들이 꼬리를 잡히게 되고 경찰쪽에서도 순만을 의심합니다.   


    순만의 집으로 유괴사건 피해자 아동의 부모님이 경찰들과 함께 오게되고, 순만의 목소리를 듣고는 기겁을 하며 순만을 내려칩니다. 그렇게 공소시효 2일인가 3일을 앞두고 쓰러진 순만은 의식을 잃게 됩니다. 이 때, 다은은 순만의 쪽지와 필적이 담긴 것들은 모두 싹 없애버립니다. 피해자가 찾아오기 전 다은은 기자를 사칭하며 피해자 부모님에게 가서 유괴사건 당시에 범인에게 받은 쪽지를 건네받고 그 쪽지를 보고는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했던 받아쓰기 기억이 생각나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다은에게 시킨 받아쓰기는 피해자에게 지령을 내리기 위한 쪽지였던 것입니다. 


    다은은 차라리 아버지가 깨어나질 않길 바라며, 집 안에 있던 모든 증거를 없애버립니다. 다은도 공범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릴 적 자신이 원하던 원치 않았던 되었던 공범과, 현재 성인이 된 지금 스스로 공범이 되었습니다. 수사에도 협조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순만은 깨어나게 되고 목소리 검증을 하는데, 목소리 불일치로 순만은 풀려납니다.  


    순만은 풀려났지만, 다은은 아버지를 향한 의심이 확신이 되어 다시 물어봅니다. 왜 그랬냐고, 왜 어린 나에게 받아쓰기를 시켜서 공범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공범으로 만드냐고 이야기합니다. 순만은 자신은 아니라며 내 말을 믿으라고 애원합니다.  


    함께 트럭을 타고 가던 중, 공소시효가 끝난 12시 정각이 되자 순만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라고 했지..?" 자신을 옥죄여오던 15년의 공소시효가 풀리자마자 순만은 변합니다. 다은은 트럭에서 내려서 같이 죽자며 왜 그랬냐고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그 뒤에 이들을 따라 오고 있던 유괴사건 피해자 아동의 아버지가 이야기를 듣자마자 트럭을 받아버리고, 피해자 아버지와 순만은 사망합니다.  


    다은은 충격으로 튕겨져나가며 목숨은 구했으나 매우 심각한 중태에 빠집니다. 마지막 씬에서는 다은의 엄마가 나오며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어릴 적, 자신의 아이는 유산이 됐고 순만은 산부인과에서 다른 신생아를 납치하게 됩니다. 그게 다은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의 동생(삼촌)은 순만에게 끊임없이 다은을 미끼로 돈을 요구했습니다. 순만은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또 다른 아이를 납치하고 죽이게 되고 (유괴사건 피해자), 결국 다은은 납치 된 아이었으며, 범죄가 또 다른 범죄를 낳은 이야기였습니다. 입원실의 다은의 이름은 윤미선으로 바뀌게 되며 이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하느님 자녀를 유괴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범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을 안다면 나 스스로라도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그 사람도 하느님과 함께 단둘이 자기 일을 해결하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릴 때 나도 피해자가 아닌 공범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휘두르는 사람들은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범죄에 나를 가담시켜 공범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의 죄를 아담과 공유하고자 아담에게 선악과를 내미는 순간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담은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요? 선악과를 권할 때 땅에다 무언가 쓰는 시간을 가졌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지만 네 인생은 네 것이고 내 인생은 내 것입니다. 내가 비록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 쓸모 없어 보이는 일을 할지라도 그것을 멈출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침묵하며 당신이 나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다음엔 선악과를 먹으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자유입니다. 죄이지만 그 책임은 온통 자신이 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이 하와에게 휘둘리지 않고 완전히 독립적일 수 있었다면 하와도 하나만 먹고 말았을 것입니다. 죄책감은 공유할수록 작아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지면서 끝까지 그런 행위를 고집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아담이 이렇게 했다면 아담이 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착한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오히려 휘둘리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알려줄 뿐이지 그 사람의 자유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행동을 일관되게 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사람이 자신의 자유도 존중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카톡을 하루에 한두 번만 봅니다. 아침에 카톡을 한 사람은 밤에 답장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제가 그때그때 카톡에 답장한다면 정신이 없어 아무 일도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처음에 좀 기분 나빠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남의 자유는 아무리 친해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휘둘리고 있다면 어쩌면 나도 휘두르는 사람이어서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혼자 남겨져도 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다 버려져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된다는 생각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야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하려고 하는데 해도 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다 하라고 합니다. 다만 그 책임은 나에게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해서 하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나의 권고와 그 사람의 행위는 완전히 별개입니다. 그 사람이 선택하고 책임도 그 사람이 지게 합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지옥 갈 수도 있다고. 그리고 대부분 잘 알아듣습니다.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그런 사람을 바꾸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두 과정을 거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정말 훌륭한 상담가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을 꾸짖는다면 그것 역시 그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입니다. 일단 자신을 돌아보도록 내가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도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니 책임 있는 행동을 잘 생각해서 하도록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자신 행동에 대한 책임을 혼자 지지는 못하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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