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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5일 다해 연중 제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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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십일조가 부부관계도 회복시킨다고?>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라는 주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냐고 물으시니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문제를 ‘창세기’로 끌어올리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왜 예수님은 부부 문제를 창조할 때로 끌어올리실까요? 부부도 창조자의 의도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부부의 이혼 사유 중 가장 큰 것이 ‘성격 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1. 비난, 2. 방어, 3. 경멸, 4. 벽 쌓기, 위 네 가지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이혼으로 간다고 합니다. 비난은 말 그대로 남 탓을 하는 것이고, 방어는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경멸은 자신을 무시하는 상대를 미워하는 감정이고, 벽 쌓기는 아예 상대와 대화를 섞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상대를 ‘판단’하는 데서 오고 더 근원적으로는 자신이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양분하여 판단하는 시스템의 인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BS 부모 – 아이 교육법, 달라도 너무 달라요’에 아이들 양육 태도가 너무나 다른 부부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아이들이 잘못할 때 ‘타이르자’라는 주의이고 아빠는 ‘단호하게 훈육하자’라는 주의입니다. 부부는 서로 너무 안 맞아 남자가 먼저 답답해서 TV 출연을 제안한 것입니다.  


    첫째 아이는 남자이고, 둘째 아이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자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평생 장애로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힘겹게 병원 생활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첫째 아이가 소외되어 부모로부터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해 첫째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만 아이는 항상 외롭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둘째 딸도 몸이 아프기에 나름 부모의 사랑을 더 확인하려 합니다. 그 방법이 물고 할퀴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생이 자신을 물고 할퀴었다고 엄마에게 이릅니다. 아빠는 둘째를 꽉 잡고 훈육합니다. 그러나 그런 강제적인 훈육보다는 엄마는 타이르자는 주의입니다.  


    전문가들은 아빠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장애인 형이 있어서 소외를 당한다고 느꼈고 부모는 매일 이혼하겠다고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부모가 창조자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나는 ‘생존’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빠는 자녀들이 하는 행동을 창조자로서가 아니라 심판관처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훈육법을 무시한다고 느낄 때 여전히 외롭고 고통스러웠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이해받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아내에게 원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또 그런 마음을 이해해 줄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온전한 창조자, 곧 모든 생존의 책임을 져주는 부모와 함께 있지 못했기에 자신도 또한 아내와 자녀들에게 옳고 그름, 비난 등으로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와 자녀들을 심판하고 마음으로 비난하게 된 이유는 그의 부모가 충분한 창조자의 역할을 다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존을 신경 쓰게 만들었고 그 생존 문제 때문에 사람을 심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아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 1위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굳이 쓰기는 뭐하지만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이 돈 벌어오는 것을 낭비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난 돈 버는 데 넌 뭐 했느냐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아내에게 듣기 싫어하는 말 1위는 능력 없다고 무시하는 말입니다. 돈도 많이 못 버는 주제에 쪼잔하기까지 하다고 말하면 남자는 뒤집힙니다. 다 무엇과 관계됩니까? ‘생존’입니다. 그냥 주님께 이 문제를 다 맡겨드릴 수만 있다면 상대를 비난할 일이 없습니다.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한다는 말은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의 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감자를 삶아서 남편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남자가 감자를 찍어 먹더니 “이거 뭐야? 설탕이잖아. 감자를 어떻게 설탕에 찍어 먹어? 소금 가져와!” 


그러자 아내가 “감자를 누가 소금에 찍어 먹어요? 설탕에 찍어 먹지!”라고 말했습니다.  


    설탕을 찍어 먹든, 소금을 찍어 먹든 상대를 비난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 일이 “너희 집안 씨가 그렇지!”라는 가족까지 비난하는 싸움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혼하게 되어 판사 앞에 섰습니다. 그들이 판사에게 물었습니다.  


    “판사님. 하나만 물읍시다. 판사님은 분명 좋은 집안에서 자라셨을 텐데, 판사님 집안은 감자를 소금 찍어 드시나요, 아니면 설탕 찍어 드시나요?” 


판사는 말합니다.  


    “아, 저희 집안은 감자를 신김치에 싸 먹습니다.” 


    소금을 찍어 먹든 설탕을 찍어 먹든 그것은 상대를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비난하는 마음은 그것이 의미 없게 만드는 한 대상을 만날 때 사라집니다. 창조자 하느님께서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서는 나의 생존을 위해 발생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의미 없어집니다. 그러니 부부관계를 위해 창조자 하느님을 앞에 두고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할까요? 


    우리가 상대를 판단하는 이유는 창조자 하느님을 앞에 두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 앞에서 형제끼리 싸운다면 부모는 누구 편을 들어주어야 할까요? 부모 앞에서 싸우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사라집니다. 그냥 부모 앞에서 싸우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행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은 두려울 것이 없는데 어머니가 제일 두렵다고 합니다. 자신이 무슨 주장을 하려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낳았고 너를 길렀다. 이제 말해보아라.” 


    옳고 그름도 내가 생겨나고 나서야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창조되지 않았다면 옳고 그름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내가 창조자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과 같습니다.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면 그른 것이고 창조의 목적에 순응하면 옳은 것입니다. 창조자도 나의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녀들이 사이좋게 잘 지내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창조자 하느님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선악과를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 선악과를 바치지 않고 자신이 생존의 문제를 책임지려 했을 때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왜 그런 죄를 지었느냐는 질문에 아담은 하느님께 이렇게 따집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 말 안에는 자신의 잘못이 여자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 여자를 만들어준 하느님도 판단하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은 대번에 하와와 당신을 판단하는 아담이 죄의 상태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자신의 생존을 자신이 책임지려고 선악과를 자신의 것으로 취한 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창조자요 우리 모든 생계를 책임지는 주님으로 여기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십일조가 남을 심판하는 마음을 줄어들게 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형제들이 되게 만드는 신앙고백임을 잊지 맙시다.  


  https://youtu.be/JFZoOBUhbso 


유튜브 묵상 동영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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