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3일 다해 사순 제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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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마음속 아주 작은 죄까지도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율법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의로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마음’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율법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십니다. 그래야 아주 작은 율법 조항까지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일단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약함은 그것을 누를 수 있는 ‘법’으로만 통제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권침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곳곳의 CCTV는 범죄율을 낮추는 데 큰 몫을 한다는 것은 수치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를 지켜보는 ‘눈’으로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화 ‘블랙스완’(2010)에서 어머니의 꼭두각시로 어머니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불쌍한 여자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녀는 외적으로는 항상 어머니라는 CCTV 때문에 통제되어 살지만, 내적으로는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잠을 잘 때 엄마가 절대 보아서는 안 되는 음란한 행위를 합니다. 그러다 눈을 뜨니 엄마가 지켜보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랍니다.
다행히 이것은 꿈이었습니다. 엄마가 꿈에서까지 자신을 지켜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주 작은 계명입니다. 자신의 속으로 지을 수 있는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주 작은 계명이 더 중요합니다. 작은 것으로부터 댐이 무너집니다. 사탄은 우리의 아주 작은 욕구나 생각에 침투하여 결국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안 좋은 의미로 나오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셔서 우리 생각과 감정, 욕구까지 지켜보시는 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어긋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욕구’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결국 화만 내어도 살인하는 것이고, 음탕한 마음만 품어도 간음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작은 것이라도 흘려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욕구까지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몸과 생각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욕구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CCTV를 달면 됩니다.
그런데 그 CCTV가 남을 훔쳐보는 사람의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나의 마음에서 그러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더 좋아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법’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보실 수 있도록 그분께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내 마음을 보도록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내 마음을 주고 상대의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준다는 말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컴퓨터 게임 스토리 중 ‘거짓말쟁이 공주와 눈먼 왕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늑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달을 보며 아름다운 노래를 할 때 그 노랫소리에 끌려 왕자가 다가왔습니다. 늑대는 왕자를 잡아먹을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 손뼉을 쳐 주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늑대가 자기를 보기 위해 언덕을 기어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놀라고 당황한 늑대는 팔을 휘둘렀고 왕자는 그만 눈에 큰 상처를 입고 굴러떨어졌습니다. 왕자는 눈이 보이지 않아 왕권을 이어받을 수 없었고 탑에 갇혀 살게 됩니다.
자신의 노랫소리에 유일하게 박수를 보낸 왕자가 그렇게 있는 것을 알게 된 늑대는 왕자의 눈을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숲속의 마녀를 찾아갑니다. 자신을 공주로 만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왕궁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녀는 그 대가로 늑대의 노랫소리를 원했습니다. 늑대는 노래를 잃고 공주가 됩니다. 그러나 달빛을 받으면 다시 늑대가 되어야 했습니다.
공주는 몰래 탑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왕자에게 눈을 다시 뜨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왕자는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 주던 공주임을 알고 그녀를 따라나섭니다. 공주는 슬퍼하는 왕자를 위해 가는 길에 꽃을 꺾어줍니다. 몇 번 달빛을 받아 늑대로 변했지만, 왕자는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왕자는 노래를 불러달라 했습니다. 공주는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이 쉬었다며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벽에서 왕자가 미끄러져 떨어지려 할 때 공주가 손을 내밀어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달빛이 비쳐 공주의 손이 늑대의 손으로 바뀌었습니다. 왕자는 공주가 자기 눈을 잃게 만든 장본인임을 알고 공주에게 거짓말쟁이 괴물이라고 소리치고 손을 놓았습니다. 왕자는 굴러떨어졌고 왕자가 가지고 있던 불 때문에 숲에 불길이 일었습니다. 늑대는 불이 무서웠고 또 괴물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왕자를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불을 헤치고 내려가 왕자를 구합니다.
드디어 마녀에게 도착한 공주는 마녀에게 왕자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마녀는 그 대가로 왕자에 대한 기억을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다시 늑대로 돌아가야 하고 노랫소리도 들려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왕자는 말렸지만, 공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왕궁에 돌아온 왕자는 밤마다 늑대의 못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늑대의 노랫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늑대는 손을 휘둘러 인간을 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왕자는 꽃을 한 다발 내밀었습니다. 무언가 가슴 저 밑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늑대는 들었던 손으로 꽃을 받았습니다. 한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늑대는 달을 향해 노래해 왔지만 이제 이 노래를 옆에 앚아 있는 인간을 위해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상대의 심장에 자신의 CCTV를 설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자는 자기 눈을 잃어 늑대의 가슴에 들어갔습니다. 늑대가 자신만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늑대도 자기 피 흘림으로 왕자의 가슴에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CCTV가 되어 그도 왕궁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으로 들어가 그 사람을 사랑의 뜻대로 변하게 만드는 것은 ‘피’입니다. 마음은 마치 심장처럼 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시고 살과 피가 되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왕자와 늑대의 관계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이제 내가 그분을 위해 피를 흘릴 차례입니다. 그분을 위해 꽃다발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분이 나의 마음에 CCTV를 달아준 것처럼 나도 이웃의 마음에 CCTV를 달아주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김희아 씨가 자기 얼굴에 대해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는 이제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마음마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주님의 마음을 보면 주님께서 내 마음을 보고 계심을 알고, 또 내가 마음을 볼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보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을 때 마음으로 짓는 작은 죄도 짓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말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할수록 그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 모든 게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아주 작은 죄까지도 없애시는 방법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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