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3일 다해 연중 제7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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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좁은 사람이 믿지 못하는 이유; 믿음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기 때문>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속 좁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를 막아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마귀를 쫓든 마귀가 쫓겨나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마음이 매우 넓으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우리는 왜 속이 좁아질까요? 단순합니다. 나의 생존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나의 생존에 위협이 됩니다. 그래서 불쑥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몰라 몸을 잔뜩 웅크립니다.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면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옳지 않은 것으로 분별합니다.
초보 운전자를 생각해봅시다. 초보 운전자는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기고 백미러나 룸미러를 볼 생각도 안 하고 자신의 앞만을 봅니다. 그러다 운전이 능숙해지면 도로의 현황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요, 주위의 경관도 살피며 여유롭게 운전합니다. 만약 누가 위험하게 끼어들기라도 하면 브레이크를 잡으며 양보를 합니다. 그런 사람들로 운전하는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보 운전자라도 끼어들면 그리 위험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는데도 왜 운전을 그따위로 하느냐며 불같이 화를 냅니다. 상대의 행위를 옳지 못한 행위로 단정한 것입니다.
보복 운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자기 생존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조금 자존심이 상해도 자신이 죽을뻔한 것처럼 화를 냅니다. 그래서 보복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마 조직 폭력배처럼 언제라도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 있어 매우 긴장된 삶을 사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에 아주 조금만 위협이 되는 것도 옳지 못한 일이라고 여기고 응징하려 듭니다.
따라서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려면 안 죽는다고 믿으면 됩니다. 초보 운전자는 혹시 운전 잘못하면 사고가 나서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수천 번 운전을 한 사람은 당연히 오늘도 죽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러니 마음이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어떻게 우리가 죽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두 번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다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셔도 부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될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린이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생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 넓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죽으면 반드시 부활할 것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순교성인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자신의 목을 치는 사람이 힘들까 봐 자신의 목을 늘려주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에서만 나옵니다.
사람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죽어서 심판도 없고 내세도 없고 창조주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하십시오. 그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있건 없건 이것은 둘 다 증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선택’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믿고 넓은 마음으로 살던지, 아니면 믿지 않고 두려움 속에 속 좁은 사람으로 살던지는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어차피 한 인생 사는데 노련한 운전자처럼 죽음 걱정 안 하고 좋은 경관도 즐기며 살다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왜 굳이 좋은 삶의 길이 있는데 질이 나쁜 것을 선택하며 살아야 할까요? 이처럼 선택하면 그만인데 이것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속 좁은 사람입니다.
옛날에 돌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을 사려면 집에서 종이 위에 자신의 발을 그려서 그것을 내밀면 그 크기에 맞는 신발을 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쇠가 신발을 사려는데 자신의 발 치수를 그려놓은 그림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그 종이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다 닫혀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아니, 돌쇠 양반. 그냥 신발을 신어보면서 고르면 되지 왜 그걸 가지러 다시 다녀왔소?”
돌쇠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내 발 크기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게 집에 있는데 왜 내 발로 신발을 맞춰봐야겠소? 당신은 옳고 그름도 판단할 줄 모르오?”
어리석음과 속 좁음은 하나입니다. 너무 옳고 그름만 생각하면서 우리가 안 죽는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질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라 여기고 믿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어리석음 때문에 속 좁은 사람이 됩니다.
왜 생존을 걱정하면 옳고 그름의 분별심에 갇혀 속이 좁은 사람이 될까요? 만약 한 숟가락의 농약을 먹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내가 죽습니다. 그래서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속을 좁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면 마치 커다란 호수처럼 약간의 독이 퍼져도 전혀 상관없기에 자신 안에 들어오는 것이 독인지, 아닌지 큰 관심이 없습니다. 한 숟가락의 농약을 커다란 호수에 뿌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옳고 그름에 큰 관심이 없어집니다. 죄가 되지 않는다면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넓은 마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두 하인이 자기가 옳다고 싸우다 한 하인이 화가 나서 주인에게 모든 사실을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말이 옳구나!”라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인이 와서 또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가 옳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부인은 “그럼 누가 옳단 말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양반은 “당신의 말도 옳구려, 허허!”라고 웃었습니다.
옳고 그름은 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분별입니다.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우린 죽어도 사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은 옳고 그름이 아닌 선택의 문제입니다.
한 사람이 천년 된 산삼을 더덕인 줄 알고 우연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셔서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더니 어머니가 다시 건강해지고 몇 년은 더 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피가 아픈 사람도 낫고 몸도 젊어지게 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드릴 피를 조금 받아서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이때 중간 관리가 “내가 당신의 피를 좀 마셔보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별생각 없이 “그러시지요”라고 하며 병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피를 조금 마셨습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자 노발대발하며 “임금의 것을 탐한 저자를 당장 처형하여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이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죽을죄를 지었고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옳으신 분이시다면 임금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저에게 준 저 사람도 함께 처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은 그의 현명한 말에 그를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내 안에 생명이 들어오면 옳고 그름의 분별심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습니다. 결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길은 포용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으로 속이 좁아지는 이유는 죽음이 두려워서입니다. 제자들도 아직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이 좁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https://youtu.be/-ZqBV-Jdn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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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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