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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9일 다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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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이유>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은 항상 ‘의로움’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의롭다’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 앞에 나설 힘’을 말합니다. 돈을 꿔 가서 갚지 않으면 의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갚기 전까지는 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아드님을 의로움의 옷으로 만들어 우리를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요? 의로움이 깨집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입었다면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려 해도 우리가 주님 앞에 설 힘을 잃습니다.  


    김희아 씨를 생각해봅시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 보육원에 버렸습니다. 김희아 씨는 부모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잘못하는 다른 부모들을 평소에 심판하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딸인 김희아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른 부모들을 심판한 것 때문에 더욱 자신들이 키우지 않은 딸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돈 2억 갚아”란 마지막 말을 하고 떠난 어떤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몇 년 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돈을 꿔 가서 자취를 감췄다가 형이 죽기 직전이라 죄를 용서받기 위해 왔던 것인데, 형은 마지막 힘을 주어 “내 돈 2억 갚아”란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죗값으로 내어주셨습니다. 내가 형제에게 꾸어준 돈 때문에 끝까지 그것을 받아내려 한다면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희생시켜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만큼 내 양심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분 앞에 나설 힘을 키워야 하는데, 그 힘이 의로움인 것입니다. 내가 거저 용서받았으니 거저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내어주신 하느님 앞에 설 힘을 가지게 됩니다. 



    구약에 대표적인 인물이 유다입니다. 유다는 막내아들 벤야민이 이스라엘 재상이 된 요셉의 은잔을 훔친 것이 발각되자 벤야민을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대신 감옥에 갇히겠다고 자청합니다. 그러자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청해서 이집트에 팔려 온 요셉이 자신을 형제들에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제야 그들이 요셉을 만날 힘을 가지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수준끼리 관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기나 기생충과 관계 맺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은 주는 만큼 내어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요셉은 어떻게 의로울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의로운 사람은 이웃의 죄까지도 나의 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이 짓는 죄들을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세상 모든 죄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죄는 모두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들입니다.  


    ‘프리쳐’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지옥이 재미있게 표현되었습니다. 지옥은 잊고 싶은 과거의 잘못들을 매일 똑같이 되새기며 사는 것입니다.  


    유진이라는 한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 트레이시의 집에 초대받습니다. 트레이시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져 그 충격으로 자살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유진은 하느님은 더 놀라운 기적을 준비해 놓으셨고 그것을 보려면 살아야 한다고 위로해줍니다. 트레이시도 그의 말에 감동하여 자신이 하려던 쓸데없는 짓을 그만둡니다.  


    이때 트레이시는 유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오랫동안 트레이시를 좋아했던 유진은 트레이시에게 키스합니다. 트레이시는 유진까지 자신에게 그러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여 참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유진도 그렇게 합니다. 둘 다 죽지는 않았지만, 트레이시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유진도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힘을 가진 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 목사에게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꾸 그러니까 참다못한 목사님이 “그럼 지옥에나 가버려라!” 하니 지옥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이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 유진이 지옥에 오자 이 홀로그램 시스템에 문제가 생깁니다. 간수들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 손들어봐”라고 말합니다. 지옥에 있는 대다수는 손을 번쩍 들며 자신들은 진짜 지옥에 와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들지 않습니다. 자신만큼 지옥에 합당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치고 결코 자신이 지옥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 안에서 죄를 찾아낼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동과 생각과 욕구로 살아갑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해서 간음이 아니라 음탕한 욕구로 여인을 바라보아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욕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만이 존재합니다. 이 욕구와 반대되는 사랑이 들어올 때, 내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 내 욕망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과 반대가 되는 죄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들이 다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든 크든 세상 모든 사람이 짓는 죄는 세속-육신-마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사랑하려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그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게 만듭니다. 바로 사랑도 욕구이고 모든 죄의 근원도 욕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거울 앞에 서면 자신 안의 악의 근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면,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만약 행위만 가지고 따지자면 분명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구로 보자면 다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면 나에게 짓는 죄에 대해서도 내가 미움까지 가지 않을 무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비행기를 잡는 유도탄이 있다면 비행기는 그 유도탄을 교란하는 교란탄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판단이 될라치면, 그 미움은 마치 유도탄처럼 나에게 날아옵니다. 만약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교란탄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을 결국엔 심판하게 됩니다. 그러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임신하고 온 마리아의 죄를 자신이 다 짊어지려 했습니다. 요셉이 그냥 파혼하면 임신시켜 놓고 살기 싫어 파혼시키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이 판단되면 유도탄이 날아온다고 생각하고 빨리 내 안에서 그와 같은 죄를 찾아내어 교란탄으로 떨어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의로움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란탄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려는 의지로 얻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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