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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1일 다해 사순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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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안 내는 법; 에덴동산에서는 화 날 일이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주시려는 의로움과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비교하십니다. 그러며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자칫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큰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의로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지키지만 화는 내고,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지키지만 음탕한 마음을 가지며, 자선은 하지만 남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행동은 바꾸지만 속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조차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로움은 나의 의지로 행동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사람인 척하는 것은 언젠가는 힘이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 ‘성을 내는 것’이 나왔기에 이것으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은 내는 것은 고칠 수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화를 내고 말도 안 통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린데도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의 ‘폭언하는 두 얼굴의 아들’입니다. 아이는 게임머니로 아버지, 어머니 몰래 수백만 원을 결제하고 경찰서까지 데려간 아버지 앞에서 그냥 소년원에 보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모는 매우 차분합니다. 부모를 닮았다면 아이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가 바빠서 아이의 가장 중요한 성장 시기에 할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잔소리와 간섭이 심합니다. 무조건 말을 하면 다 고쳐지는 줄 압니다. 배가 나왔다고 살 좀 빼라고만 합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는 매우 불쾌합니다. 할머니의 잔소리는 자신을 존중해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들어 높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결국 사랑한다고 사랑하는데 아이를 통해 자신의 무언가를 채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왜 화를 내는 것일까요? 부모에게 버려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하느님을 피해 몸을 숨기는 아담과 하와의 처지와 같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피’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에덴동산에 살 수 있게 만드는 ‘가죽옷’입니다. 그 피가 의로움입니다. 내가 의로워져 에덴동산에 살면 화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화는 에덴동산 밖에서 내는 것입니다. 가죽옷은 분명 창조자의 피 흘림을 전제합니다. 창조자의 피 흘림 없이는 에덴동산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본인들 힘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입니다.  


    에스키모인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고 합니다. 화가 풀린 곳에 막대기를 꽂아놓고 오는 것입니다. 화는 본성이기 때문에 그 본성 안에 머물면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본성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본성에서 벗어나려면 에덴동산에 살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시려는 의로움이 곧 당신 가죽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 가죽옷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피 흘림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우리 아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가 나왔습니다. 금쪽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노 조절을 못 합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누나에게도 막말을 쏟아냅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은영쌤이 추천한 방법은 ‘몸 관찰하기’였습니다. 거울을 가져다 놓고 오은영쌤이 금쪽이를 보고 “네가 생각하기에 바른 자세로 앉아봐”라고 합니다. 아이는 일부러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삐딱한 모습으로 앉습니다. 이때 “거울로 한번 봐봐. 바른 자세인지 한번 봐봐”라고 하니까 아이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더니 바른 자세로 앉습니다. 그리고 또 무언가 의미 없는 일을 시켰는데 잘 따라 합니다.  


    그런데 왜 엄마의 말은 안 들었을까요? 오은영쌤이 금쪽이를 에덴동산으로 데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거울이 바로 가죽옷의 역할을 합니다. 가죽옷도 그렇지만 거울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우선 ‘아버지’가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는 오은영쌤이 있습니다. 성을 내는 것은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내가 자녀에게 성을 낼 수는 있지만, 직장 상사나 본당 신부님에게 와서 성을 낼 수 있을까요? 화가 나도 참을 것입니다. 금쪽이는 지금 오은영쌤과 수많은 제작진이 둘러싸고 있기에 그들 앞에서 힘에 눌린 것입니다.  


    그다음은 ‘아드님’이 계셔야 합니다. 성을 내는 것을 자신이 보면 고쳐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거울 효과’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바꾸는 것을 거울 혼자 할 수 있을까요? 아이는 매일 거울을 봅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마지막으로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금쪽이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아이가 이것을 바라며 성의 기둥에 들어가 있는 어머니 덕분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그것을 누르고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그 많은 사람의 고생을 무시할 만큼 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모는 거울과 같은 모범, 창조자의 권위, 그리고 자녀를 위한 피 흘림,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없다면 자녀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피 흘림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의 의로움과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창조자의 피가 섞여 있느냐, 섞여 있지 않으냐에 따른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피 없이도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이 표출되는 것이 성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자의 피는 성낼 일이 없는 에덴동산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감사만 남지 성낼 일이 없습니다. 성내고 사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화는 자아에서 나오는데 자아는 창조자의 피만이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이 에덴동산이 아니라면 화나는 것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본성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남의 문제입니다. 어둠은 어둠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면 어둠은 저절로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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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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