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4일 다해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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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4일 다해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단식은 고통의 원인이 허기짐보다는 헛헛함임을 보게 한다>
오늘은 ‘단식’ 논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사이들까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단식의 참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예수님은 단식하는 이유를 당신과 함께 있거나 함께 있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시키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함께 있지 않다면 마치 단팥 빠진 찐빵처럼 헛헛합니다. 배가 부를지라도 무언가 빠진 것 같습니다. 이것은 허기짐과 다른 말입니다. 허기짐은 단팥이 빠졌더라도 빵만 먹으면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헛헛함은 단팥을 먹어야만 해결됩니다. 단팥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위해 단팥 빠진 빵을 먹는 것을 멈추는 일이 단식입니다.
지금 하는 일로 나의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지금 나를 채우고 있는 것들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살펴봐야 합니다.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은 단팥인데 빵만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리어카 할머니의 반전 소문 – 집 두 채를 소유하고도 폐지 줍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몸보다도 몇 배 크고 무거운 폐휴지가 산더미처럼 쌓인 손수레를 하루도 빠짐없이 20년간 모아 팔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 벌어보아야 만 원 돈입니다. 추운데 길에서 식사하고 작은 빌라에서 불도 때지 않고 아주 불편하게 삽니다. 병원에 있는 아들에게 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는 집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을 팔면 조금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을 텐데 할머니는 그 집을 병원에서 큰아들이 나오면 결혼해서 살게 해 주려고 아끼고 있습니다. 28년간 월세방을 전전하며 아이들을 키운 할머니는 집 없는 설움을 아이들에겐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조현병으로 쉽게 회복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집을 마련하기 위한 대출금과 아들의 병원비를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 할머니에게 불행은 집이 없는 것이었기에 계속 집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가 채워질 수 있을까요? 노력하는 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잠시 멈춰야 합니다.
공갈 젖꼭지는 아무리 빨아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의 가슴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가슴 대신 공갈 젖꼭지로 엄마의 가슴을 대신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엄마의 가슴의 필요성을 잊습니다. 그리고 공갈 젖꼭지가 자신의 허기짐을 채워준다고 믿습니다. 이젠 공갈 젖꼭지를 빼앗으면 웁니다. 이런 아이에게 유일한 약은 공갈 젖꼭지를 물지 않아도 괜찮다는 체험의 시간입니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엄마의 가슴이 그리워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있었다는 것을.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물질적인 것으로라도 배고픔을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허기짐이 아닌 헛헛함입니다. 이 헛헛함은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실체를 믿지 못하니 헛헛함과 허기짐을 구별하지 못하고 허기짐을 채워주면 헛헛함도 채워질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위 할머니도 아들을 위해 빌라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 빌라로 돌아오면 아들의 헛헛함이 채워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의 사랑입니다.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창조자의 사랑입니다.
자아가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헛헛함은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사랑을 느낄 때만 해결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서 헛헛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아는 그 헛헛함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허기짐을 채우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중독되든 컴퓨터에 중독되든 그것은 다 어머니에게서 오는 사랑의 부재를 잠시 잊기 위해 자아가 만들어내는 수단일 뿐입니다. 모든 집착은 어머니가 진짜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함을 잊기 위한 방어기제입니다. 잠시 허기짐이 채워지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더 헛헛해집니다. 원인을 알 수 없어 짜증을 내보지만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이때 해야 하는 것이 단식입니다. 인터넷을 끊어보고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보지 않는 것입니다.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젖도 못 먹는데 공갈 젖꼭지까지 뺏어버리는 꼴입니다. 그런데 그런 단식을 하면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 진정한 고통의 원인이 육체적 허기짐이 아니라 정신적 헛헛함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헛헛함을 보게 되면 이제 그것을 채워줄 사랑을 찾습니다. 부모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사랑을 창조자에게서 찾습니다.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바로 발견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잃은 이들은 단식으로 다시 신랑을 찾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저는 단식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사도’(2014)에서 영조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자기 아들 사도세자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입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꼭두각시였습니다. 왕권이 약했던 영조는 늦게 얻은 아들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아버지가 두려웠습니다. 아무리 옷을 갈아입어도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는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뒤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헛헛함을 채울 수 있는 기행들을 멈추는 공간입니다. 허기짐이 채워지지 않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됩니다.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말합니다.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소. 사람이 있고 공부와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공부와 예법이 사람을 옥죄는 국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이것을 알면서도 사도세자는 어쩔 수 없이 사랑 대신 술과 폭력과 기행을 그 공갈 젖꼭지로 물고 있었습니다. 미리 뒤주로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받지 못했던 따뜻한 눈길과 다정한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서 찾아보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뒤주는 우리가 사순절 때 단식하며 기도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광야와 같습니다.
전에 야식을 먹으러 한 식당에 갔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한 남성 어르신이 혼자 식사를 하시며 일하고 있는 여주인과 큰 소리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약주도 한잔하시고 이미 거나해진 그분은 제 착각일 수는 있지만, 주인아주머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아주머니는 단골손님이기 때문에 억지로 받아 주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가시면서 그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미친놈이다. 내가 미친놈이여. 허허. 밥을 한 그릇 다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네. 그러니 내가 미친놈이지. 허허.”
이건 누가 봐도 배가 고픈 상황이 아닙니다. 헛헛한 것입니다. 참사랑이 그리운 것인데 세속적 사랑이 채워지지 않아 자신을 배고픈 미친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친 짓입니다.
진정한 단식을 해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랑을 잃은 신부처럼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식이 열어주는 눈입니다.
단식은 그리스도를 향한 희망을 키워줍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진짜 이유는 허기짐이 아닌 헛헛함임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헛헛함을 보면 단팥과 같은 어머니 품과 같은 하느님의 양식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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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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