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7일 다해 주님 부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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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6)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으로서 부활하실 수 있으셨다면 같은 하느님 자녀인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라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현세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이 우리를 악인으로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모기와 예수로 나뉜다고 할 때, 모기가 되는 이유는 현세적 집착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생존하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영화를 보면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 살려고 기를 씁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2차 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권력에 대한 복종 실험을 시행한 바 있습니다.
지원자들은 교사와 학생군으로 분류됐고, 교사가 낸 문제를 학생이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기의 전압을 15볼트씩 올리도록 했습니다. 물론 충격기는 가짜였고, 지원자들은 이를 몰랐습니다. 또한 학습자(학생)는 밀그램이 섭외한 배우였습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밀그램의 불합리한 지시와 통제 속에 실험자의 65%가 최고수치인 450V까지 전기충격기를 올린 것입니다. 학습자(배우)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면 즉각 실험을 포기할 것이란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살려달라는 학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밀그램의 말에 피험자들은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전기를 흘려보냈습니다.
밀그램은 자신의 저서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 ‘복종 실험’에 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피험자들이) 실험자의 지시에 너무나 기꺼이 따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실험의 결과는 놀랍고도 당혹스럽다. 많은 피험자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실험자에게 항의하지만, 상당수의 피험자가 전기충격기의 마지막 단계까지 계속한다.”
마찬가지로 1971년에 행해진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실험’을 통해 강압적인 특수 환경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관찰했습니다.
모의 감옥에서 피험자들은 교도관과 죄수로 나뉘었고, 각각의 역할을 수행토록 했습니다. 어색하던 분위기와 달리 교도관들은 죄수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점점 고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관의 행위는 악랄해졌고, 통제 불능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실험 5일째에는 성적 고문까지 이어졌습니다. 강하게 저항하던 죄수들은 저항력을 상실했고, 간수들의 권위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됐습니다.
인간이 동물적 본성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 충격적 결말입니다. 또 이 실험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 자란 독일인들이 어떻게 유대인들을 500만 명이나 비인간적으로 학살할 수 있었는지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유대인들을 언젠가는 부활하여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렇게 학살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실험이 끝난 뒤에 교도관을 했던 사람들과 죄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함께 며칠 동안 소풍 가는 프로그램이 계획되어 있었다면 교도관들이 그렇게 악랄하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다시 만나야 함을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기충격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전기충격을 준 그 사람을 나중에 문을 열고 만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렇게 끝까지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이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서 죽음 앞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화 ‘리스타트’(2019)는 죽으면 매일 아침 7시에 똑같은 삶을 시작한다는 전제의 영화입니다. 아침 7시가 되자마자 킬러들이 들이닥칩니다. 이렇게 수십 번 죽고 나니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게 됩니다. 본인도 왜 이런 삶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전의 기억들이 축적되어 킬러들을 소탕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집과 차와 생명까지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주인공은 이혼한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집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그들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하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는 죽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200번 가까이 죽으며 그들이 죽기 전에 도달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지 않게 합니다. 죽었다 깨어남을 반복할 때 유일하게 가치 있게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어차피 죽고 부활하면 아무 상관 없지만 사랑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란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인간은 원죄의 영향으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자신들이 찌른 상처를 그대로 지니신 채 자신들 앞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실 것을 믿었다면 그분을 그렇게 찌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착해지지 못한 이유는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입니다. 나의 선택입니다. 착해지고 싶은지,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는지에 달렸습니다. 다만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내 죽음엔 무관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착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