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5일 다해 사순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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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웃을 대하는 본성으로 하느님께 나아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사람들에게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대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결론지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결론적으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깔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하느님 공경이 위선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저도 봉사자들을 어쩔 수 없이 평가해야 할 때 저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더 아래 봉사자에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저에게는 사제이기에 모두 잘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본심이라기보다는 저를 이용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랫사람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자아가 강하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사람이 저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면 믿지 않습니다. 물론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아랫사람을 더 공경하고 높여줄 수 있는 봉사자가 되도록 인도하려고 합니다.
제일 겁나는 것은 저 자신입니다. 저도 제가 신자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을 대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신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고 스승이라 불리려는 모습을 보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다를 게 없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본성과 윗사람을 대하는 본성이 다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남편을 대하는 모습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을 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불만족을 채우기 위해 자녀를 이용하는 아내라면 남편에게 다르게 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따르는 본성은 하나입니다.
동물원 우리 속의 곰은 매우 유순해 보이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곰을 본인이 키워보려 하다가 뼈만 남게 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러시아의 한 사냥꾼이 자신의 마당에 있는 케이지에서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던 불곰에게 잡아먹힌 일이 있습니다. 4년 전 사냥 중이던 세르게이는 새끼 곰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자신이 키웠습니다. 그 곰은 자신의 마당에서 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작은 곰은 빠르게 성장을 하고 야생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곰을 자신이 키워준 덕분에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곰은 성장하면서 세르게이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곰을 보호소로 보내라고 하였지만, 세르게이는 충고를 무시하고 곰을 계속 데리고 다녔습니다. 곰을 길들이며 산다는 일종의 과시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르게이는 보이지 않았고 곰의 우리가 열려 있었습니다. 세르게이와 세 마리의 개 모두 잡아먹혔습니다. 그중 한 마리의 개는 뼈도 남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맛을 본 곰은 또 인간을 노릴 것이기에 경찰들은 흔적을 쫓아 곰을 찾아 사살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배은망덕한 불곰의 탓일까요, 아니면 곰의 본성을 무시하고 자신 뜻대로 커 주리라 여긴 주인의 잘못일까요? 본성은 본인이 인간이라고 믿기 전까지, 그러니까 두 발로 걸으려고 시도하기 전까지는 변한 게 아닙니다.
2003년 곰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야생에 들어갔다가 곰에게 잡아먹힌 티모시 그레드웰은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약 겁먹으면 나는 아마 죽거나 다칠 겁니다. 이 땅에 있으려면 정신을 꽉 잡고 있어야 해요.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날 갈기갈기 찢을 거예요. 그러면 전 죽습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며 그들을 위해 죽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죽을 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날카로운 야생에서 싸우며 강해질 것이고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스터(스승)가 될 것입니다.”
그의 이 말에는 상대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자만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상대를 내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언제나 자기 본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속으면 큰일입니다. 왜 다른 것을 잡아먹는 곰이 자신은 안 잡아먹을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요? 아무리 개가 아기들을 잘 돌봐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개와 아기 둘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개가 고기의 맛을 안다면 다시 늑대처럼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본성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그 하나의 본성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볼 것이고 그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신도 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어머니가 자녀와 온전한 관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인간이라 믿으면 난 언제나 곰과 같은 모습입니다. 언제든 나를 키워준 주님을 먹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나의 본성은 내가 하느님이라 믿을 때, 그래서 하느님처럼 할 수 있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본성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 전에 당신을 보여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지 않으면 관상기도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는 단계에서도 내가 자녀에게 이 믿음을 주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깨우쳐주지 않는다면 나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알려주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걱정, 근심하고 또 경쟁하며 살도록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께 맡기면 다 잘 될 것이라 믿을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을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상대를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을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가 결정됩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개 우리에서 5년동안 키워졌지만 20년이 지나도 본인은 개라고 믿습니다. 끝까지 본인이 개라고 믿으면 사람과 관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에게 “너는 사람이야!”라고 보아주고 말해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사람의 본성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웃을 대하는 본성이 나의 본성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 촬영 때 4년간의 암 투병을 숨기고 활동하던 김자옥 씨가 자그레브 대성당을 들어가자마자 신자도 아닌데 눈물을 철철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당은 그저 그녀에겐 돌과 유리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김자옥 씨는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언가 기도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돌로 지어진 건물 안에 나보다 더 위대한 누군가의 존재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이웃이 그저 돌집처럼 보여도 주님의 존재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주님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대하면서도 하느님을 대하는 것처럼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사람을 하느님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나도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녀에게 대하는 모습이 남편에게 대하는 모습이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윗사람을 대하는 모습이고, 이웃을 대하는 모습이 주님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대하는 본성을 알고 싶거든 내가 이웃을 어떤 본성으로 여기는지 살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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