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5일 다해 사순 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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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부모를 사랑할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라고 하시며 사람은 아래와 위, 두 세상에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돌아가 하늘에 속하고 유다인들은 땅에서 와서 땅에 속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다 땅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으면 육신이 썩어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속한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당신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여기서 “내가 나”라는 뜻은 모세가 들은 하느님의 이름, 곧 ‘나는 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죄 속에서 죽습니다. 하늘에 속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의 아버지가 하느님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자신이 속한 세상은 아버지가 만든 세상입니다. 아버지를 바꾸지 않으면 아버지의 세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페인 영화 ‘늑대의 살갗 아래’는 돈만 아는 아버지를 둔 두 딸의 인생이 그려집니다. 너무 큰 추위에 아무도 살지 않는 스페인 북부의 한 마을에서 늑대사냥을 하며 사는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겨우내 사냥하고 늑대 가죽을 무두질하여 이틀이나 걸쳐 산 밑으로 내려가 가죽을 팔아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사냥꾼이었습니다. 사람과 잘 소통하지 못합니다.
그는 사실 방앗간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그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주고 그 여인의 아버지와 거래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큰돈을 받고 딸을 팔아넘깁니다. 그녀는 임신하였지만 몸이 약했습니다. 그곳엔 의사가 올 수 없었기에 사냥꾼이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봤지만, 그녀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기를 낳다가 여인이 죽습니다. 아기도 죽습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가 딸이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도 자신에게 팔아넘겼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챕니다. 분노에 가득 찬 그는 아내의 시신을 지고 장인을 찾아갑니다. 장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이제 막내딸을 보여주며 돈을 내고 딸을 데려가라고 합니다. 딸은 이 사실도 모른 채 사냥꾼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냥꾼이 파놓은 언니와 조카의 두 무덤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직감합니다.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사용하라고 독약과 같은 약초를 줍니다.
딸은 임신하여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곳을 탈출해야겠다고 여기고 차에 독초를 타서 남편을 죽이려 합니다. 사냥꾼은 이유도 모른 채 몸이 약해져 갑니다. 이를 틈 타 아내는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짐승을 잡기 위해 설치해 놓은 덫에 걸립니다. 사냥꾼은 간신히 아내를 찾아 데려왔지만, 아내는 얼어서 거의 죽음 직전이었습니다. 유산은 했지만, 사냥꾼은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서 살려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내를 놓아줍니다. 원하지 않으면 내려가라고 합니다. 사냥꾼은 아내가 자신에게 독을 먹였다는 것을 알았고 쓰러진 후 혹독한 겨울을 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다. 두 딸의 아버지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으로 딸을 팔아도 딸이 잘살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아내를 사는 사람에게서 딸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물건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사냥꾼도 지극정성으로 두 자매인 아내들을 돌보는 것 같지만, 만약 아내들을 위한다면 병원이 가까운 동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는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두 딸은 돈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자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운명은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상하고 사랑스러우면 아기는 세상을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악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악하면 자녀도 정글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므로 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번 정해진 아버지를 바꿀까요? 잔인하게 말하면 아버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기는 아빠가 일란성 쌍둥이일 때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그저 자신에게 밥을 주는 대상을 아버지, 어머니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실제로는 이 세상에 속하고 싶어서 세상 아버지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선택했으면 아기들처럼 그 아버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는 다섯 명의 범죄자 집단에서 길러진 화이란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범죄자 집단에서만 머문다면 당연히 범죄자가 됩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세상에 갇힙니다.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화이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들이 다 괴물인데…. 너도 괴물이 돼야지…. 안 그래? 그래야 같이 살지.” 나쁜 아버지들은 화이가 자신들의 편이 되게 하려고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합니다.
화이는 그 아버지들과 살면서 괴물을 봅니다. 괴물 아버지들과 함께 머물면 괴물들의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화이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한 다섯 명의 아버지를 죽입니다.
우리는 괴물처럼 되어서 세상에서 적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참 아버지 하느님을 죽인 그 아버지를 죽여서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삼키면 그분은 빛이 되어 우리가 지금까지 섬겨왔던 대상이 괴물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아에 조종당하여 죽인 분이 나의 진짜 아버지이심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1)
천국으로 가려면 새로운 아버지가 지금 나의 아버지를 죽이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아버지를 죽여야 합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지옥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만 일어납니다. 이는 상황이 아닌 아버지를 잘못 선택한 탓입니다. 그 지옥이 지금까지 내가 섬겨온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부모를 버려야 합니다.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모기로 머뭅니다. 모기는 사랑하려 해도 피를 빨고 있을 것입니다. 부모를 버리고 하느님을 부모로 섬길 때 하느님의 자녀로 지금까지 키워주신 부모님을 사랑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