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9)[강원경제신문-2025-10-22]
컨텐츠 정보
- 30 조회
- 0 추천
- 목록
본문
▲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순조 1) 음력 1월 10일에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사학엄금(邪學嚴禁)의 교서(敎書)를 세상(世上)에 공포(公布)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전국(全國)에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천주교 신자(天主敎信者)들을 탄압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근거가 되었던 오가작통법이란 어떤 법을 말하는 것인지 자세히 살펴 본다.
오가작통법은 다섯집을 가지고 일통(一統)을 이루어 그 통(統)을 단위로 연대 책임(連帶責任)을 지우는 제도(制度)로 상호 감시(相互監視)와 상호 고발(相互告發)을 촉진함으로써 인화(人和)를 깨뜨리는 비인도적(非人道的)인 법이었다.
그런데 오가작통법을 순조(純祖) 대에 처음 실시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이전 세조(世祖) 대에도 실시하였는데, 당시의 목적은 저수 관개(貯水灌漑)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협동의 힘을 나타낼 수 있도록 지도하고자 시행되었다.
이제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展開過程)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2월 5일에 내포(內浦)에서 이존창(李存昌)을 시작으로 9일에는 서울에서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홍낙민(洪樂敏),강완숙(姜完淑) 등을 포함해 많은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이와 같이 체포한 많은 신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순교(殉敎)하거나 배교(背敎)를 하는 경우에는 유배(流配)를 갔다.
이와 관련해 2월 24일, 감옥(監獄)에서 권철신(權哲身)은 순교하였으며, 이가환은 옥사(獄死)하였다.
이어서 2월 26일에 이승훈,정약종,홍낙민,홍교만(洪敎萬),최필공(崔必恭),최창현(崔昌顯)이 서소문(西小門)밖 형장(刑場)에서 또한 이존창도 충청감영(忠淸監營)에서 참수형(斬首刑)으로 순교하였다.
한편 함께 체포되었던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兄弟)는 2월 26일 사형(死刑)에서 감형(減刑)되어 각각 전라도(全羅道) 강진군(康津郡) 신지도(薪智島)와 경상도(慶尙道)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流配)갔다.
그러나 그해 9월 29일 황사영(黃嗣永)이 백서 사건(帛書事件)으로 인하여 서소문밖 형장에서 순교한 이후 다시 각각 전라도 흑산도(黑山島)와 강진(康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박해가 시작되자 비밀리에 서울을 떠나 국경(國境)인 의주(義州)까지 이르러 청나라로 귀국하려 했으나, 이렇게 되면 자신(自身)으로 인해 신자들이 더욱 피해보게 될 것을 걱정해 본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3월 12일 의금부(義禁府)에 자수(自首)하였다.
그런데 주문모 신부는 청나라 사람이었으므로 조정(朝廷)에서 외교적 문제(外交的問題)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여러차례 중신 회의(重臣會議)를 한 끝에 최종적으로 사형(死刑)을 집행(執行)하기로 결정(決定)하였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