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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조선후기 여성지도자 강완숙(골롬바) 생애 고찰(4)[강원경제신문-202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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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박관우


주문모(周文謨신부(神父) 1794(정조 18) 조선(朝鮮)에 입국(入國)하여 사목생활(司牧生活)을 수행한지 6개월만에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구체적으로 밀고(密告)에 의하여 주 신부가 입국한 사실과 그의 처소(處所)가 조정(朝廷)에 알려지게 되어 외국 신부 체포령(逮捕令)이 내려지는 상황에 처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를 최인길(崔仁吉)의 처소(處所)로 옮기는데 성공하였으나,당국(當局)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져 오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최인길이 결단을 내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실천하였는데구체적으로 자신이 주문모 신부로 변장하여 결국 체포되었으며그러한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주 신부가 피신하는데 성공하였으니주 신부를 대하는 최인길의 그 숭고한 정신에 숙연한 심정 금할 수 없다.

 

그런데 당국(當局)에서 최인길이 주문모 신부가 아니란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를 체포하였으며같은 날 주 신부 영입(迎入)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윤유일(尹有一)과 지황(池璜)도 함께 체포되기에 이르렀으니이를 을묘박해(乙卯迫害)라 한다.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 위의 3인은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추궁하는 당국의 집요한 심문(審問)에 일체 자백하지 않았으며결국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주 신부의 행방을 말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3인의 심문 광경을 당시 포도청 기록(捕盜廳記錄)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죽음을 기뻐하고 삶을 미워하며 곤장 맛보기를 마치 엿 맛보듯이 하고 입을 꼭 다물어 한마디도 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795(정조 19) 5 12일 최인길을 비롯하여 윤유일지황은 장살(杖殺)의 처분(處分)을 받고 장렬한 순교(殉敎)를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박해의 여파가 3인의 순교로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주문모 신부를 체포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이승훈(李承薰)은 예산(禮山)으로 유배(流配)를 갔으며이가환(李家煥)은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정약용(丁若鏞)은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각각 좌천(左遷)되었다.

 

이와 같이 을묘박해는 규모상으로 볼 때대규모 박해는 아니었으나 정조(正祖)의 측근이며남인(南人)의 대표적인 학자(學者)들이 유배가거나 좌천되었기 때문에 정국(政局)에 미치는 파장(波長)이 간단치 않았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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