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31일 다해 사순 제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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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인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증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신이 자신을 증언하는 것은 유효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자기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세례자 요한’을 내세우십니다. 그는 빛 자체는 아니지만,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자기 일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여러 기적과 목소리를 통해 아드님을 증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예로 드십니다. 모세의 성경이 다 당신에 대한 증언이라 하십니다.
이렇게 여러 증언을 내세우시는 이유는 그런 것들로 믿으라는 말씀이 아니십니다. 그런 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섬기기로 한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오시는 그분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이 겪게 되는 현상이 있는데 ‘인지부조화’입니다. 그냥 ‘고집’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중국의 그 많은 무술 고수들이 쉬샤오둥이라는 격투사에게 깨졌습니다. 쉬샤오둥은 중국 무술이 실전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픈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고 나서도 바닥이 미끄러웠다느니, 쉬샤오둥이 다칠까 봐 일부로 봐주었다느니, 아침을 잘못 먹어 설사해서 그렇다는 이유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분명 모든 증거가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 부재를 말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도 느끼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전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믿는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에게 영광을 주려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가져다 놓아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이라 가르쳐줘 굳게 믿고 따라왔는데 알고 보니 그 반대였음을 깨달으려면 열심히 자아를 믿고 달리다 넘어져 봐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 안에서 ‘유혹자’를 찾아내게 됩니다.
김미경 강사가 4년 만에 ‘어쩌다 어른’에 출연하여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논문표절로 9시 뉴스에 나오기 전까지는 돈도 많이 벌고 자신의 이름을 딴 TV쇼를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물론 그때도 정신병원에 가봐야 할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꿈을 쫒으라고 젊은이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망하고 나니까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자아가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녀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걸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자신의 꿈의 노예가 되어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 안에는 제1존재, 제2존재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1존재는 태어날 때의 본래 나이고 제2존재는 자라면서 생겨나 꿈을 쫒으라는 새로운 나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제2존재가 바로 나인 줄 알고 착각하고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신은 제1존재였습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냥 밥 먹고 잠자기만 해도 행복한 나가 꿈을 쫒으라는 제2존재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제1존재로 살다가 또 기회가 오면 제2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제2존재, 곧 우리가 에고(ego)라고 부르는 이 존재의 본성을 아직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보다는 아니겠지만 또 세속-육신-마귀에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아를 섬길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집착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갤럭시가 좋냐, 아이폰이 좋냐의 문제와 같습니다. ‘확증편향’이 생깁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에 틀렸어도 돌아서지 않습니다. ‘인지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은 서로 근거를 놓고 싸우는 일이 아닌 이 분열의 근본 원인이 ‘자존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모든 싸움의 원인이 ‘자아’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니 모든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압데라는 어리석고 고루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슈트루치온이라는 치과의사는 이웃 마을 게라니아에 왕진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간밤에 암당나귀가 새끼를 낳아서 자기 당나귀를 포기하고, 당나귀 몰이꾼인 안트락스의 당나귀를 돈을 주어 빌리고 같이 옆 마을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황무지를 지나다가 날씨가 매우 무더워 잠시 당나귀를 세우고 당나귀 밑에 드리워진 그늘 속에 주저앉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당나귀 몰이꾼은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나귀를 빌린 것이지 그림자를 빌린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치과의사는 절대 줄 수 없다며 거절하고, 논쟁이 거듭되자 재판관에게 찾아갑니다.
재판관은 중재를 시도합니다. 몰이꾼에게는 나귀의 그림자에서 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치과의사는 감사의 성의 표시만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둘은 동의합니다. 그러자 양쪽에 변호사가 붙습니다. 자신이 꼭 이기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자 둘은 갈 데까지 가보자고 합니다.
치과의사는 자기편을 더 만들기 위해 수선공 조합의 조합장을 찾아갑니다. 조합장은 치과의사의 후원자가 되기로 합니다. 한편 비조합원인 몰이꾼은 신전의 사제에게 줄을 대고자 합니다. 도시에는 개구리를 섬기는 신전과 염소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당나귀 몰이꾼은 개구리를 모시는 신전의 사제에게 줄을 댑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치과의사는 염소를 섬기는 신전 쪽을 자신의 편으로 만듭니다.
둘은 서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려고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마침내 도시는 치과의사를 지지하는 ‘당나귀 그림자당’과 당나귀 몰이꾼을 지지하는 ‘당나귀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당나귀당은 개구리 신전에, 당나귀 그림자당은 염소 신전에 모여서 의지를 불살랐습니다.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입니다.
재판은 합리적인 시선으로 볼 때 당나귀그림자당 쪽으로 전개되는 듯싶었습니다. 당나귀의 그림자까지 당나귀 몰이꾼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재판을 내려버린다면 두 파간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 모든 문제는 당나귀에게서 비롯되었으니 당나귀를 재판정에 증인으로 세웁시다”라고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한 사람이 당나귀를 보더니, “이 모든 것이 저 당나귀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소리쳤고 사람들은 일제히 당나귀를 죽이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참조: ‘인생의 방해꾼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지혜’, 유튜브 채널, ‘지혜롭다’]
정말 이 마을에 전쟁이 일어날 뻔한 것은 당나귀 때문이었을까요? 당나귀는 그저 희생양일 뿐입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 근본 원인입니다. 그들은 또 다른 당나귀를 찾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고 다른 의견은 묵살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에덴동산의 뱀임을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싸우게 된 것은 선악과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뱀 때문이었습니다. 그 뱀을 모르면 그 싸움의 원인이 사라져도 다른 원인을 찾아 자기 영광을 추구할 것입니다.
자아를 뱀이라는 구체적인 상징으로 이해해야 더는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아를 믿는 일이 없습니다. 누가 뱀에게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내 집에 더는 살지 못하도록 죽이려 할 것입니다.
세계 평화로부터 내 마음의 평화까지, 이 모든 평화가 깨지는 근본 이유는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자아를 뱀으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이것만 알면 세상은 천국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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