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다해 사순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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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자기감정의 원인을 움직이는 수레바퀴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돌아온 탕자의 형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시는 대상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들고 계시는 것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과 함께 기뻐해야 옳은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아버지만을 위해 일했는데 방탕하게 살고 돌아온 동생에게만 잘해주는 것이 얄미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써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하지 않았음이 증명됩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느님께 속하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기쁨의 원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내가 어디, 혹은 누구에게 속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감정은 내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은 내가 속하려고 하는 대상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는 그 감정의 원인을 나르는 수레바퀴입니다.
‘요나’(Jonah)라는 단편 영화 내용입니다. 움부나와와 그의 친구 주마는 한 휴양지 바닷가에 사는 절친한 친구입니다. 둘은 관광객의 사진기와 같은 물품들을 훔치는 좀도둑입니다. 그들은 사진기를 훔쳐 아름다운 자신들의 마을을 홍보하여 더 큰 휴양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은 물고기가 잘 잡히는 것 빼고는 이렇다 할 뷰포인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진기로 여기저기 찍는 순간 그들의 인생을 바꿀 대형 사고가 터집니다. 주마가 음부나와를 촬영하는 그 순간 거대한 물고기가 물 위로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함께 찍힌 것입니다. 음부나와는 흥분하여 이 사진으로 마을을 홍보하자고 합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물고기를 보러 몰려들었고 관광객이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쓰레기와 향락 시설도 함께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움부나와는 ‘피시 맨’이라 불리며 이 지역의 가장 유명한 홍보대사가 됩니다. 움부나와는 행복을 마음껏 즐깁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사진을 찍어준 친구에게는 점점 관심을 잃어갑니다. 움부나와는 돈과 향락에 물들어갔고 물고기는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 주마는 너무 변해버린 움부나와를 떠납니다.
세월은 흘러 움부나와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더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멋진 바닷가를 이렇게 쓰레기장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외롭게 바닷가를 바라보던 움부나와에게 그 큰 물고기가 보였습니다. 그 물고기를 잡는다면 마을을 다시 한번 일으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는 배 한 척을 끌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혼자 힘으로는 그 물고기를 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움부나와는 물고기와 사투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거대해지고 더 더러워진 그 물고기는 음부나와를 삼켜버립니다.
이 영화는 구약의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만들었다고 봅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결국 들어가게 된 것이 큰 물고기의 배 속입니다. 그는 다시 자기 행복의 원천을 하느님의 뜻에 둡니다. 그리고 니네베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들어갑니다.
감정은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이라 여기는 것에 내 마음을 둘 때 그 행복이라 여기는 것으로부터 감정이 비롯됩니다.
우리는 마치 마차의 바퀴와 같습니다. 마차의 바퀴는 중심에 축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있고 그 중간에 여러 개의 살이 바퀴를 지탱합니다. 가장 중간의 구멍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무언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종속됩니다.
바큇살들이 바로 여러 감정입니다. 내가 마음을 두고 있는 것에 의해 감정들이 나옵니다. 바퀴는 그 감정들에 의해 움직이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만약 내 마음을 하느님 사랑의 축에 끼우면 나의 감정은 그것에 의해 좋게 바뀌고 그러면 사랑의 행위가 나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을 하느님께 두면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고 하느님과 함께 슬퍼합니다. 세상 감정들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이 됩니다.
내 마음을 하느님께 두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할 줄 몰랐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마음이 다른 곳에 꽂혀있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그 마음이 부모에게 꽂혀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기뻐하시는데 우리가 슬프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감정을 뽑아내는 다른 것에 먹힌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할 것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움부나와는 물고기에 자기 마음을 빼앗겨 절친 주마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 잃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기면 좋은 감정이 솟아납니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는 사실 두 아들의 모든 감정을 다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감정은 열려있었고 첫째 아들의 감정은 닫혀있었습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나머지 모든 감정의 원인은 어둠입니다. 빛은 태양이고 어둠은 블랙홀입니다.
‘만개’(In full bloom)라고 번역되어도 괜찮을 이런 단편 영화도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별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행복의 원천은 남편이었습니다. 아내는 밖에 절대 나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택배로 주문하고 집안에서 남편이 하던 식물을 가꾸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화분에서 지렁이 몇 마리가 나와 거실을 파고듭니다. 이내 그 구멍은 블랙홀이 되어 점점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입니다. 집안에서 달아나려 해 보지만 지금까지 밖을 나가보지 않아서 밖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편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남편이 좋아하던 화분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내는 갈등합니다. 화분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화분과 함께 남편의 기억이 있는 블랙홀로 들어갈 것인가. 영화는 후자를 택합니다. 이는 어떻게 세상 것으로부터 감정을 얻어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최후를 보여줍니다.
빛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나머지 우리에게 감정을 일으키는 모든 피조물은 실제로 바퀴와 같은 우리를 굴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감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입니다. 요나처럼 자신을 만든 분의 목적대로 그분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퀴는 구르게 되고 자신이 딛는 땅의 느낌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블랙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맏이의 모습은 아버지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끼워 넣지 못한 가짜 하느님 자녀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 것에 감정이 휘둘리면서 하느님 자녀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끼워져야 하는 마차 바퀴와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피조물에서 비롯되는 감정에 종속될 것인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에 종속될 것인가는 우리 선택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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