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5일 다해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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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차려진 식탁에서만 성장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왜 식사하는 것까지 트집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에게 투덜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신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죄인들을 치료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신비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식탁. 이어서 그 식탁 안에서 치유되고 자라는 자녀들입니다.
먼저 ‘아빠–엄마–사랑’을 ‘성부-성자-성령’처럼 삼위일체로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식탁입니다. 식탁은 아빠가 벌어온 돈과 엄마가 아빠를 위해 자신을 내어줌이 만나는 곳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서도 결혼해서 신혼생활 할 때의 꿈을 꾸었는데 그 식탁에서 아내가 불만을 말하니 꿈속에서도 기분이 나빴던 것이 기억납니다. 나가서 돈 벌어오기 싫은 마음이 확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상황에 아이가 놓여있다면 아이는 당연히 자아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는 생존이 불안할 때 커집니다. 왜냐하면, 생존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싫거나 아내가 남편을 위해 제대로 된 식탁을 차려주기 싫으면 그 식탁에서 식사하는 자녀는 ‘불안’을 느낍니다. 부모의 불안함이 자녀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스스로 생존하려는 마음이 커지는데, 그렇게 자아가 큰아이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그래서 식탁에 앉은 자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생존의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 안에서 자녀는 돈에 대한 집착이나 자신만 아는 마음이 성장할 수 없고 오히려 치료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서 오고 가는 사랑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세리는 특별히 돈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탁 안에서 돈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지고 세리는 그렇게 돈 좋아하는 마음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런 삼위일체로 만들어진 환경 안에서 자라지 않는 아이는 반드시 돈에 대한 욕구이든, 육욕에 대한 욕구든, 힘에 대한 욕구든 간에 치유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6회 ‘힘 과시하는 감당 안 되는 아이의 폭력성은 ADHD 때문일까요?’가 방영되었습니다. 금쪽이는 여자아이인데도 친구 사귀는 법을 모릅니다. 자신과 놀아주지 않으면 때리겠다고 하고 하늘나라 보내버리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엄마에게도 대듭니다. 식탁에서 지시하는 것은 거의 따르지 않습니다. 생떼를 쓰고 욕을 하고 음식을 엄마에게 쏟기도 합니다. ADHD 약을 먹어도 상태가 악화되어 유치원에 등교시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금쪽이는 자신이 아빠를 대신해 엄마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빠가 폭력을 가하여 엄마 얼굴에 피가 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혼한 엄마를 보며 아이는 생존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 것이 아빠의 폭력과 엄마의 약함이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를 바꾸려면 엄마에게 자신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합니다. 엄마가 먼저 하느님을 굳게 믿어 마음을 평화롭게 해야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먹고 삽니다. 엄마가 불안하면 아이도 불안합니다. 아이를 바꾸려 하지 말고 먼저 엄마부터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도 평화를 찾고 그 식탁에서 자아가 죽어가며 온전한 하느님 자녀로 성장합니다.
상황이 안 좋다고 상황 탓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에서 아빠와 엄마는 5살 아이와 함께 독일군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탑니다. 엄마와 아빠는 수용소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빠는 재치있는 행동으로 홀로 떨어진 엄마에게 자신과 아들이 살아있음을 알립니다.
낯선 환경에서 독일군에게 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을 뻔히 아는 아빠는 아들에게 1,000점을 따면 탱크를 탈 수 있는 게임이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빠의 말을 듣고 수용소의 상황이 탱크를 탈 수 있는 하나의 게임이라고 믿어버립니다. 아빠는 죽음 직전도 아이 앞에서 웃으며 나아갑니다. 아이는 끝내 들키지 않고 살아 엄마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탱크를 타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아이가 불안하지 않으려면 부모부터 불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축음기를 이용해 아내와 함께 보았던 오페라 음악을 틀어줍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아무 걱정 할 필요 없다며 죽음 직전까지 안심시킵니다. 이 때문에 아이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감정이 식탁에서도 벌어져야 합니다. 결국, 먹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면 일단 맨 밑에 계약의 궤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계명 판과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느님 아버지를 상징하는 구름이 내려옵니다. 그 중간에 대사제가 잡은 소의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그 중간 자리가 속죄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빠를 상징하는 구름과 엄마를 상징하는 계명판 사이에서 차려지는 사랑의 식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식탁에서 자녀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이런 식탁을 마련하여 우리 자아를 죽여 우리를 치료하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식탁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련하는 평화의 자리입니다. 그 평화의 자리에 머물 때 우리는 치유되고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항상 이 자리에 머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관상의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보는 세상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일지라도 온통 사랑입니다. 그냥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임 환경을 자신이 유리하게 만들어갑니다. 그 안에서 또 누군가는 게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생존 걱정을 하는 부모는 자녀를 식탁에서부터 망칩니다.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와 신자 간에 남편과 아내가 마련한 식탁처럼 따듯한 온기가 있는 분위기가 없다면 누군가를 성당으로 데려와도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지 못합니다. 자녀는 따듯한 밥상이 차려진 식탁에서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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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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